판소리 한류 '원조 개척자'··· 그 뒤엔 부친의 '혜안'이 있었다

<명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고창 흥덕 '국창' 김소희 생가> 신동일 기자l승인2016.08.24l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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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 박초월과 함께 현대 판소리사를 대표하는 國唱(국창) 김소희(金素姬, 1917-1995)는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명창이다. 본명은 김순옥(金順玉)이며, 호는 만정(晩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판소리중 춘향가, 서편제 예능보유자인 만정 김소희는 맑고 고운 애원성의 독특한 음색을 지닌 천부적인 예술가로 태어났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녀는 13세때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15세에 송만갑 문하에서 심청가, 홍보가를 익히며 본격적으로 판소리에 입문했다.

일찍이 천재성을 알아본 아버지 김봉호는 당시 최고 명창으로 알려진 송만갑(宋萬甲) 명창에게 대려가 문하에 들게 하였고 여기서 만정(晩汀)은 소리의 진수를 배웠다. 18세 때 정정렬(丁貞烈, 1876-1938)에게 춘향가와 흥보가를 전수 받았으며 22세 때 박석기(朴錫基, 1899-1952)의 주선으로 담양군 남면의 지실초당에서 박동실(朴東實, 1897-1968)에게 심청가, 수긍가, 흥보가를 학습했다.

김소희는 30대에 정응민(鄭應珉, 1896-1963), 정권진(鄭權鎭, 1927-1986), 박록주(朴綠珠, 1909-1979), 김여란(金如蘭, 1906-1983), 박봉술(朴鳳述, 1922-1989) 등을 찾아가 각기 다른 판소리 명인들의 창법을 익혔다.

판소리 외에 전계문(全桂文, 1872-1940)에게 가곡과 시조,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배웠고 정경린으로부터는 무용을 전수받았으며 이후 서예와 한학도 공부하는 등 다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송만갑이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에게 김소희를 소개했고 그의 소리에 탄복한 이화중선이 각종 무대에 그를 세웠다.

18세부터 오케레코드와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심청가와 적벽가를 취입해 소녀 명창 이름을 얻었으며 20세에는 당대 쟁쟁한 명창들과 함께 녹음을 하는 등 명성을 쌓아갔다. 조선권번(朝鮮券番) 소속 동기(童技) 때는 여창가곡과 가사를 익혀 경성방송국에 출연했고 음반에 취입했다. 1930년대에는 판소리 다섯마당의 눈대목을 익혀 음반취입과 방송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경성방송국에 출연해서는 강산풍월을 포함한 단가 및 가곡과 육자백이 등 수많은 민요와 춘향가 등을 방송했다.

1931년 12월 29일 처음으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김소희는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의 눈대목을 방송했고 눈대목을 방송할 때마다 강상풍월, 건곤가, 장부가 등의 여러 단가를 불렀다. 1936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직속단체로 창극좌가 창단됐을 때 강태홍, 김세준, 김연수 등과 함께 창극활동을 전개했다. 그해 6월 11일 빅타 축음기회사의 춘향전 전편 취입 때 출연했고 한성준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단가 ‘강상풍월’을 비롯한 판소리의 여러 눈대목은 일본 콜럼비아 음반에 전한다.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됐으며 1940년 12월 24일 제일극장에서 박석기가 창단한 화랑창극단의 창단공연 때 조상선, 한주환, 김여란 등과 함께 춘향전에 출연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광복 후 1948년 초 창단된 국극협회의 대표인 박동실이 무대에 올린 ‘고구려의 혼’ 공연 때 성원목, 공기남, 김득수 등과 함께 출연했고 1948년 9월 1일 국악여성동우회가 출범했을 때 그녀는 회장 박녹주, 부회장 김연수 등과 함께 창단공연으로 그해 11월 시공관 무대에 올려진 ‘햇님과, 달님’에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1955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과 국악예술학교 설립에 공헌했으며 개교와 동시에 판소리 교사로 재직했다. 1958년 대한국악원의 직속단체로 출범한 시범국극단의 대심청전 공연 때 김연수, 조애낭, 김득수 등과 출연했다.

196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9회 국제민속예술제에 출연한 것을 비롯해 1964년 삼천리가무단의 한 사람으로 미국 전역을 순회공연에 나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미국 카네기홀에서의 판소리 공연과 28개주 각 대학의 초청공연, 뮌헨 올림픽의 민속예술 공연은 판소리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세계무대에 올려놓았다.

천부적인 목을 타고난 명창으로 평가되고 있는 만정은 청아하고 미려한 목소리를 지녔으며 극한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절제미를 잘 발휘해 우아하고 유장한 창을 구사하는 등 섬세하면서도 지나친 기교를 멀리하는 창법을 지향했다.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정정렬, 송만갑, 정권진, 박봉술, 박동실 등 여러 스승에게 배운 소리대목 가운데 좋은 대목을 적절히 조합해 새롭게 구성한 ‘춘향가’는 동.서편 소리의 특성을 고루 갖춘 소리로 평가된다.

1959년 국악진흥회가 수여하는 제4회 국악상을 수상한데 이어 1962년 세계방송 대상, 1972년 문예진흥공로상,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2년 제1회 한국국악대상, 198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7년 제1회 동리대상, 1994년 방일국악상 등을 수상했다.

안향련(安香蓮, 1944-1981), 한농선(韓弄仙, 1934-2002), 박초선(朴招宣, 1931-), 박송희(朴松熙, 1927-), 김동애(金洞愛, 1948-1984), 오정숙(吳貞淑, 1935-2008), 안숙선(安淑善, 1949-), 성창순, 남해성, 이일주, 신영희(申英姬, 1942-), 박양득(朴良德, 1947-), 오정해 등이 그의 제자다.

국창(國唱)의 칭호를 얻었던 명창으로 우아함을 추구하는 여창 판소리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만정(晩汀) 감소희는 1995년 4월 17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고창 화산계곡에 안치되어 있다.

/고창=신동일기자.sdi@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으로 불리는 만정 김소희 생가는 고창 흥덕면 김소희길 33에 위치하고 있다. 생가 근방은 곰소만에 자리 잡은 포구였으나 지금은 갯벌이 간척되어 대부문 논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하천을 따라 바다로 가는 물길이 남아 있다. 생가 왼쪽은 노령산맥이 포진하였고 오른 편은 변산반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현재 생가는 2002년 5월 인근 주민들의 기억과 고증을 토대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으며 ㄱ자 형태의 초가지붕을 얹은 민가로 온돌방 3칸과 부엌 1칸으로 황토와 지푸라기를 짓이겨 바람벽을 만들었고 댓살로 문과 창문을 엮었다.

이곳에서는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판소리 명창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으며 안방 문 위에 김소희 사진과 가족사진이 걸려있고 뒤뜰에는 장독대와 우물, 헛간 등이 남아 유구한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

/고창=신동일기자.sdi@


신동일 기자  green04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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