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전주는 삼한시대부터 도읍지로 지역 중심 역할을 했다. 전주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757년 신라 경덕왕 때다. 그 뒤 후백제 때는 수도로서 기능을 했다. 고려시대에도 전주부라고 해서 지방 행정의 중핵 도시였고 조선조에는 조선조 발상지로서 격이 높은 도시였다. 조선조 내내 풍패지향 즉 왕이 난 곳이라 해서 제법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성문 이름도 풍남문, 패서문이었다. 도시 규모나 경제력으로 보아도 전주는 한성과 평양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의 큰 도시였다.
  전주에 규모를 갖춘 성곽이 등장한 것은 적어도 후백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에도 성이 있었겠지만 후백제 때 왕도로서 대규모 성이 축조됐다. 이후에 고려 공양왕 때인 1388년 전주읍성이 건설됐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주부성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성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주성이 수난을 맞은 시기는 일제 강점기 전후의 일이다. 일제가 양곡 수송을 위해 1907년 전군도로를 내면서 전주부성의 성곽을 헐어내기 시작했다. 성곽이 무너지자 을사늑약 이후 성 밖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시내 중심부로 진출했고 그 것이 다시 남은 성곽마저 완전히 철거되는 촉진제가 되고 말았다. 결국 부성의 네 개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풍남문만 남고 건물로는 객사가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전의 전주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는 보물 제1586호로 지정된 전주지도다. 그 크기는 가로 90cm에 세로 150cm로 꽤 크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산수화풍의 지도로 성곽은 물론 관아와 객사, 경기전, 한벽당 등이 명확히 그려져 있다. 건물뿐만 아니라 하천, 산, 다리 등 주변 지형도 잘 나타나 있다.
  거의 잊혀가는 전주성이 최근 프로축구팀 전북현대에 의해 되살려져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전주 월드컵 경기장을 전주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는 지난 19일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결승 1차전에서 UAE의 알 아인팀을 2대1로 격파하고 기선을 제압했다. 그날 경기장은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미디어들은 당시 경기장의 모습을 전주성이라는 이름을 실감할 만큼 남다른 위엄이 있었다고 전했다.
  전주부성은 사실 복원돼야 할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사대문과 성곽 일부라도 옛 모습을 재현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예산 등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삼남 지방의 거진’ 전주의 면모는 전주부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 전북 현대 프로축구 팀이라도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며 그 명성을 되살리고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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