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개성을 중심으로 국내 상업과 국제 교역을 담당한 개성상인은 우리나라 대표적 상인집단이다. 그들은 여기서 축적한 자본으로 생산 부문 이를테면 인삼재배나 홍삼제조업 혹은 광산 등에 투자해 다시 돈을 벌었다. 특히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면 개성상인들은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개항 전 개성상인들의 자본은 국내 최대 토착 민간자본으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다.

개성상인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 대해 울산대 홍하상 교수는 ‘개성 상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그들은 먼저 한 푼이라도 아낀다는 신조를 갖고 있다. 이른바 짠돌이 경영이다. 그래서 개성상인들은 남에게 돈을 빌려주지도 또 빌리지도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쓸데에 있을 경우 아낌없이 내놓는 것도 특징의 하나다. 신뢰경영도 이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신용을 최고의 상도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 또 상업 외에 다른 쪽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한우물 경영을 한 대표적 상인집단이다. 그 외에도 스스로 개성산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런 강점들이 개성상인을 한국의 대표적 상인으로 올려놓는 원동력이었다.

일본인들도 이에 놀랐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인의 상업’에서는 “개성상인들은 기회 포착에 대단히 영민하고 신용을 중요시해 신용거래를 발달시켰으며, 화폐이식에 철두철미 했고, 대단히 근면하고 검약하다. 그들은 상인으로서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불리던 OCI 창업주 이회림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12일 여러 행사가 열렸다. 이 회장은 신용, 검소, 성실이라는 개성상인 3대 덕목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해방 직후 포목도매상과 무역회사 설립으로 시작된 그의 사업은 1960년대 소다회 공장을 세워 제조업 불모지였던 한국에 화학공업의 깃발을 꽂았다. 이후에도 사업을 확장해 오늘날 재계서열 24위의 대기업을 만들어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기념식은 물론 전시회 등이 다채롭게 개최됐다.

개성상인은 한 마디로 한국형 경영의 효시다. 그들이 고안해낸 복식부기인 송도 사개치부법을 비롯해 상업 사용인제도와 송방이라는 지점 경영 그리고 독특한 신용거래제도인 시변제 등은 오늘날에도 통할 정도로 선진적이었다. 실제로 혹독한 시련을 딛고 개성상인 후예들은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왔다. 외국의 경영이론 수입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에 대한 연구도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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