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지속되는 무더운 여름이면 많은 중생들은 물가로 산속으로 혹서를 피해 숨어든다. 본인도 책상머리에 앉아 어디로 숨어볼까 생각 중에, 요즘 유난히 기억을 잡고 가는 운암면 소재지에 위치했던 전주 아닌 전주 식당 긴 그림자 끝자락으로 가본다. 장마 때가 오면 옥정호에 물이다 채워지고 난 뒤 맨 뒤에 수위가 오르는 곳 지류 변에 자리 한 전주 식당은 오랫동안 어림잡아 삼십 년 넘게 운영 돼왔다. 최근에는 임실 정읍 물 걱정 덜 수 있게 옥정호 댐 수위 올리니, 그곳에 사는 원주민 들은 보따리를 싸 들고 고향 떠나야 하는 수몰민들이 돼버렸다. 여하튼 그 시절 호시절로 되돌아가보자 전주식당은 온고을 식도락가들에게 맛있기로 소문난 민물고기 매운탕 명소다. 특히 이 계절은 제 집 구멍 찾아 들락거리는 물방게들처럼 수많은 식객들 덕에 문턱을 몇 번 갈아 끼웠다는 후문이 있었다 새하얀 모조지로 옷 입은 교자상 위, 펄펄 끓는 오모가리 매운탕에 맛깔스러운 토속 반찬 끌어안고 땀 펄펄 흘리며 초복, 중복, 말복과 대결하는 미식가들의 장면 장면이 16미리 필름이 되어 머릿속에서 돌아간다. 식당은 그 뒤 수몰 발표 훨씬 전에 그 집 며느리 인지 딸인지에 의해 전주 평화동에 자리를 잡았다. 나 개인적으로는 민물고기를 즐겨 하지 않는다. 근자에 들어 옮겨진 전주 식당 내용을 그 시절 전설의 식객들에게 물어본다. “지금도 그 맛이냐고.” 그렇지 않단다. 그 맛도 정취도 낭만도 아니다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즉, 자연을 떠나서는 살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더욱더 입맛은 훨씬 민감하다. 서두에 전주 식당 운운하다 보니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본질의 뜻은 다른 곳에 있는데 말이다. 풍요와 맛의 고장 전북에서 맛의 전설로 남은 전주식당 그 집을 지탱해온 에너지는 가족사진에 스며있다. 그곳은 우리나라 어느 변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풍경이다. 장맛비 겐 뒤 마을 어귀에 싸여진 뒤엄 자리 위로 된장잠자리 빙빙거릴 때, 타일 박힌 주방 지나 튓마루 딛고 올라서면 문지방 위로 좁은 갓 쓴 삼대 할아버지, 쪽 틀어 비녀 꽂고 하얀 무명 저고리 입으신 할머니, 족두리에 연지 곤지 찍은 엄마 앞에 장닭 끼고 서있는 아버지, 그렇게 파리똥으로 코팅된 사진 액자 너 댓개 넘어 이간 장방으로 들어선다. 칼라시대가 펼쳐진다. 사관 모자 쓴 오빠, 학사모 올린 언니, 전국 웅변대회에서 금메달 목에 건 셋째 동생, 대둔산 정상 노송에 기대선 얼룩 빼기 교련복 사나이 막내, 실타래 입에 물고 붓을 꼰아든 이 집안 대주 큰 오빠 아들 돌 사진이다. 보름달 박혀 있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경대 귀퉁이에 꽂혀있는 베트남 하노이 강 돛단배 난간에 서서 찍힌 최근 엄마 아빠 사진, 북벽 가장 높게 걸린 태극기 밑으로 두 해, 세 해 걸러 온 온가족이 찍은 가족사진, 처음 사진 등장인물 10명에서 출발, 16명, 30명 할아버지 팔순 잔치에는 70명이 넘나든다. 행복한 가정이 분명하다. 이 집은 잡은 물고기 좋은 곳 가라고 초 하루 시루떡 고사 지내는 것은 필수일 터이다. 우리 사는 이곳저곳 가족 상실 시대에 와 있다. 내려서 입었던 옷, 커다란 솥단지 걸쳐놓고, 손바닥 만한 국자로 열개 넘은 대접에 국을 퍼담고, 샘가에서 소금 들고 차례 기다리는 아침풍경, 그렇게 살아왔던 의식주가 낭만이고 충만이고 할것없이 기억 저쪽 끝으로 증발 되어 버렸다. 간소하된 재례의식 더욱 각박해진 시류 속에 믿음이 없어진 철저한 개인의 세계로 돌변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래서는 안될일이다. 끝으로, 요즘 그렇게도 가슴뛰고 즐거운 대한민국 여름방학 이다. 서울로 중국으로 미국, 부산으로 돈벌로 공부하러간 아들 딸 손주 며느리 모두 불러모아 가족사진을 찍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해마다 찍자. 그것이 후대에 물려줄 유산이고 대한민국이 올바르게 서서 살아 갈 길 중에 하나다.
한국 예총 전북연합회 회장 선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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