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로 국민연금공단 고객지원실
 
 
인사발령으로 이삿짐을 쌌다. 두 번째 주말부부 생활이다. 가장이 멀리 떠나는 것을 가족들이 많이 아쉬워할 줄 알았다. 그러나 반응은 의외였다. 아내와 아이들은 원망 한마디, 서운한 기색하나 없다. 도리어 홀가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장인 나의 부재는 다른 가족에게는 큰 의미를 부여할 사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족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아버지로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근엄한 아버지만 보다가 아버지 노릇을 해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솔직히 죽을 맛이다. 남들처럼 자식하고 호프도 한잔하고, 영화도 보고, 가족여행도 가고 싶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20대 자녀와 50대 아버지인 거리가 남극에서 북극까지이니, 어쩌면 내 바람은 영원한 희망사항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원인 제공자를 따지면 분명 아버지인 나이다. 가족에게 의견을 묻지 않아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다정다감한 아버지보다 무소불위의 독불장군 노릇을 했으니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안다. 아이들이 민감한 사춘기시절, 추억거리를 쌓기보다는 공부하라고 우격다짐하는 내가 한심한 아버지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존재를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아이들을 보면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떤 세파도 넘을 수 있는 강인하고 근엄한 아버지였다. 산골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보고 자랐다. 교통사고로 고생하시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강인함과 근엄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났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환경으로 인해 부족한 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변명을 해 본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따뜻한 보금자리보다는 내가 책임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꼈을 때도 있었다. 군대를 제대 후 복학하는 아들과 재수생 꼬리표를 달고 있는 딸아이를 볼 때 아버지의 책임감을 더욱 느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들이 잘 되라는 의미로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많았다. 빨리 직장에 취업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정한 말 한마디가 말없이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이 더 좋은 격려가 될 수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기억이 떠오를 때면 혼자 소주 한잔으로 달래곤 한다.
 가끔 친구들과 소주 한잔 할 때 삶의 넋두리를 안주 삼을 때가 많다. 내가 먼저 시작하면 친구들 역시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쏟아낸다. 모두들 자식을 향한 아쉬움과 회한을 쏟아낸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똑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만 초라한 모습인 줄 알았는데 친구들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식과의 소통 부재의 주범은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쓴 웃음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어쩌면 이게 지금 50대의 자화상인지 모르겠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아버지의 존재란 파도에 쓸려나가 한 뼘 흔적만 남는 모래섬 같아 초라해진다.
 이제 어느덧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 객지에서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의 존재가 무엇일까? 나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불을 밝혀주는 등대일 것이다. 이름 모를 무인도에 홀로 선 등대가 고깃배의 길잡이 되어 주는  것처럼 아버지는 가족에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주는 존재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등대보다는 외딴섬이었던 것 같다. 나의 범주를 정해놓고 아집만 피는, 그래서 소통이 없는 그런 섬이었다. 아이들이 뛰어놀 만큼 크지도 않은 작은 섬인데 내 생각이 모두 옳은 줄 알았다. 그러니 소통이 없는 섬에 갇힌 가족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섬에서 탈출하고 싶다. 아니 탈출은 못하더라도 작은 등대라도 되고 싶다. 소통하는 등대, 길잡이가 되는 등대가 되어 잃어버린 아버지의 존재를 회복하고 싶다. 그 길은 쉽지 않겠지만 오늘부터라도 하나씩 노력해 보련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아내에게 문자를 넣는다. 아버지는 남편은 가족을 아주 아주 사랑하고 있다는 문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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