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소녀의 아침은 언제나 고소한 우유향으로 시작됐다. 얼룩무늬 젖소의 큰 눈망울을 꼭 빼닮은 소녀는 엄마 아빠의 분주한 일상을 열심히 눈으로 좇았다.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면서도 눈과 귀는 바빳다.
그렇게 보고 배운 소녀의 일상은 이제 그가 이끌어 갈 일생의 과업이 됐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23살, 부모의 뒤를 잇기 보단 부모를 넘어설 '청출어람'의 각오로 반짝이는 청년농업인 심다은(23)씨를 만나봤다. /편집자주

임실군 치즈마을길. 도로 이름부터 고소함이 가득한 2차선 아스팔트길을 터덕이며 지나다보면 소담한 2층 벽돌집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자태를 뽐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귀여운 글씨체로 '두마리 목장'이라고 쓰여진 큼직한 간판이 보이고 그 간판 아래서 회계장부 작성에 골몰하고 있는 심다은씨를 만날 수 있었다.
딱 봐도 앳되고 동그란 눈망울이 매력적인 다은씨는 어린 나이에도 담담하면서도 침착한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나갔다.
23년 전, 그러니까 다은씨가 태어날 즈음 서울의 번잡한 생활을 접고 유기농업을 위해 임실로 귀농한 다은씨 부모님은 제대로 된 정착도 하기 전에 실패부터 맛봤단다.
지금에야 유기농 상품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그것이 소비로 이어지는 패턴이 정착됐지만 23년 전엔 상품가치 자체를 인정받기도 쉽지 않았단다. 서울에서도 유통업을 해왔던 경력으로 소포장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부모님은 결국 두 손을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임실까지 내려왔는데 빈손으로 떠날 순 없었다고. 그러다 임실이 치즈의 고장인 것을 생각하고 당시엔 낯설었던 체험마을을 조성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산양 두마리를 분양 받았다. 그것이 지금의 '두마리 목장'의 시발점이 됐다.
"처음부터 큰 사업을 꿈꾸시기 보다는 저희 3남매에게 먹일 질 좋은 치즈와 우유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셨다고 해요. 어렸던 저희의 입맛에 맞추겠다고 초콜렛도 넣어보는 등 다양한 시도도 빼놓지 않으셨죠."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임실 사람' 이었던 다은씨는 부모님의 삶의 궤적을 자연스럽게 닮아갔다.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농업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숙명과도 같았다.
그 때 만난 선생님이 전해준 가르침은 지금의 다은씨를 있게 한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선생님께선 저에게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으려면 삶의 주체가 돈이 되어선 안된다고 가르쳐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저희 부모님이 살아온 길과도 맞아떨어지더라구요. 저 역시도 이곳에 남아 공동체 의식을 키우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함께 농업고등학교에서 꿈을 키우던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연구직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단다. 30여명의 동기 중 농업현장에 돌아온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2~3명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라고.
연구원으로의 삶도 충분히 가치 있지만 자신은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식(食)' 문제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다은씨는 부모님을 도울 때도, 학교에서 실습을 나갈때도 동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의미있었다고 반추했다.
특히 '두마리 목장'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운영방침과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유제품의 품질은 다은씨의 자랑거리 그 자체였다.
"시중 유제품, 특히 요거트의 경우 산양유를 첨가하는 곳은 저희가 유일하다시피 해요. 산양유는 아이들의 건강에 매우 좋고, 특히 아토피에 뛰어난 효능이 있지만 일정 비율 이상을 넣으면 맛에서부터 거부감이 있어 적정비율을 찾는 게 중요한데 저희는 그것을 찾아내 제품화 해 낸 것이죠."
지금은 베테랑의 기운을 뿜어내는 다은씨지만 '초보 농부'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흐른다. 낙농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 차에 맞딱뜨린 젖소의 죽음은 다은씨의 의지를 의심케 했다.
"500kg이 훌쩍 넘는 성우(成牛)가 하루아침에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본 날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겁이 나 울기도 했어요. 축산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겪는 일이라지만 애정을 가지고 키운 착한 소들의 죽음 앞에선 그간의 다짐이나 용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더라구요."
그날의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젖소의 치료 지식을 익히게 되면서 차츰 실수를 줄여나갔다. 이제는 소의 눈망울만 봐도 어디가 불편한지 짐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고.
어머니가 진두지휘하는 유제품 생산은 '두마리 목장'의 든든한 수입원이다. 최근 몇 년간 인기몰이를 이어가고 있는 '구워먹는 치즈'는 이곳에서도 효자상품이다.
하지만 다은씨가 정말 자랑하고 싶은 제품은 산양유를 함유한 요거트란다. 기존 시중의 요거트에 비해 매우 깊은 맛을 내면서도 영양학 측면에서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권한단다.
고객들 역시 좋은 품질의 요거트를 꾸준한 구매로 응답했다. 브랜드가 출시된 지 10년째를 맞이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의 가격 인상도 없었던 것은 정성으로 만든 제품의 가치를 알아봐 준 고객들에 대한 예우의 의미도 담겼다.
경제불황의 그늘이 날로 짙어지면서 영세기업들의 데스벨리(Death valley)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가운데 좋은 품질의 제품과 성실함만으로 10년의 역사를 써온 '두마리 목장'은 이젠 더 큰 꿈을 꿀 준비에 들어갔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외부 판로가 완전히 차단되면서 그 어느때보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곤 있지만 부모님의 노하우와 자신의 젊은 감각을 앞세워 '두마리 목장'을 임실의 '핫플(유명 명소)'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착착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동생까지 일을 돕겠다고 나서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 모두가 더욱 견고해지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두마리 목장'이 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자 '건강' 자체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의 10년을 그려 나가겠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찾아온 두 마리의 산양은 이제 30여 마리로 늘어 목장을 하얗게 물들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을 선사하고 있다. 부모님의 뒤를 이어 당찬 미래를 빚어내고 있는 다은씨의 눈망울이 소처럼 선하고 맑기만 하다. /홍민희기자·minihong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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