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근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지리산에 사람을 따르는 방죽이 있었다.

그곳은 남원이고 벙어리 방죽과 눈물방죽이 그것이다.

남원성 남쪽 5리쯤에 방죽이 있다는 선조들이 남긴 기록물의 실체는 훗날 광한루의 호수다.

그런데 그 방죽은 입이 없었다.

즉 물이 들어오는 수로 입구가 없었고 하늘에서 내린 물을 들여야 방죽물이 생겨난 천수 방죽이었다.

방죽에 물이 들어오는 입이 없다고 해서 벙어리 방죽이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또 다른 사연을 가져야 했다.

지금은 지리산에서 흘러드는 요천수를 끌어들이는 수로를 만들어 광한루 호수에 물을 받아쓰고 있지만 그것은 방죽 옆에 광통루의 누각이 들어선 이후의 일로 보인다.

이 방죽과 난형난제 한다는 쌍둥이 샘물이 있었는데 지금의 고샘이고, 그 옛날 이름 대모샘이다.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있었다.

“대모샘은 남원성 백성의 목마름을 달래고, 벙어리 방죽은 남원백성의 마음을 달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남원백성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벙어리 방죽의 사연은 이렇다.

남원성안에 살던 백성들은 억울한 일, 슬픈 일, 가슴 아픈 일이 있으면 이 벙어리 방죽에 와서 심정을 토해냈다.

백성들의 그러한 사정을 받은 방죽이 입을 다물고 백성의 마음을 나누어 준다고 해서 사람들은 벙어리 방죽이라고 했다.

물을 들이는 입도 없고, 남원 백성들의 온갖 고민을 들어주고 말없이 고통을 함께 해준다고 해서 벙어리 방죽이 되었다.

한양에서 귀양 온 한 노선비는 이 방죽 옆에 있던 선조들의 작은 글방을 헐고 그곳에 작은 누각을 지었다. 그리고는 백성의 염원이 넓은 세상과 통해지라며 광통루라 이름 지었다.

그 노선비는 남원에서 조선 백성 민초의 마음을 보았을 것이다.

남원백성들이 달밤에 나와 방죽에 내려앉은 달나라 선경을 그리며 옥황상제에게 민초의 삶이 내는 자신들의 심정을 토로하던 모습을 말이다.

그 백성의 염원들은 백성의 나라를 바라는 노선비의 염원이 되었고, 그것을 광통루에 들게 하였으리라.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조선이 백성의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광한루를 내었다.

그 곳에 춘향이야기를 들이고 춘향은 한양으로 떠나는 이도령과 이별하며 흘린 눈물을 모으니 방죽이 되었다.

전주에서 남원 오는 길목의 눈물방죽은 그 사연의 당사자다.

벙어리 방죽과 눈물방죽은 존재로 착한 남원고을의 실체다.

우리는 관광으로 60년살이를 하고, 조상은 문화로 천년살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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