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

암헌(巖軒) 신장(申檣)선생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 
쉽게 말하면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의 편액 글씨를 썼던 조선시대 명필이며 조선 초기 3정승을 지낸 신숙주의 아버지라고 말하면 쉽게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때는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유신 72인이 두문동에 들어가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고 은둔하였는데 이중에는 수은 김충한과 순은 신덕린, 그의 아들 호촌 신포시도 72인에 속한다.

신포시는 아버지 순은공을 따라 수은공의 외가인 남원부 호촌으로 귀향할 때 함께 내려와 이웃하며 소두곡에 살았는데 순은공과 수은공은 막역지간으로 허물이 없이 지냈고 이러한 관계로 수은공은 신포시를 사위로 맞이하게 된다.

신포시는 경주김씨를 부인으로 맞아 3남 4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바로 암헌 신장이다.

1382년 태어난 신장은 지금의 남원시 송동면 두신리 소두곡 마을이며,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 까지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학문의 깊이가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장의 아들 신숙주가 쓴 '암헌서첩후기'에 보면 공이 13세 때 향교에 갔는데 마침 전라감사가 남원부에 행차해 유생들을 상대로 경의시험을 치렀다.

이 자리에서 공이 종횡무진한 필세로 1등을 해 좌중을 놀라게하고 많은 지묵을 상으로 받았다.

소년 시절에 보련법주로부터 글씨를 배웠는데 법주는 공의 자질이 비상함을 알고 왕희지 서첩과 설암 이부광(李溥光)대자서첩을 주어 익히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1살 때인 1402년 문과 식년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태종은 글씨를 잘 쓴 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상서녹사(종7품~정8품)에 제수 한다. 

이후 1420년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할 때 제일 먼저 직제학에 암헌를 발탁했다. 그는 집현전을 설계하고 학사를 모집해 가르쳤으며, 맹사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주군연혁지인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만들었다.

또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해 편수관으로 정조실록 6권과 태종실록 36권을 직접 편수한 인물이다.

특히 문장과 서예에 뛰어난 것을 알고 있는 세종은 이부광의 설암 서첩에서 빠진 병위삼(兵衛森) 세 글자를 보완해 써 넣도록 명하였는데 서법이 똑같아 구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 이래로 온전히 구양순체를 익혔으며 지금 숭례문(崇禮門) 편액은 신장의 글씨로 구양순체의 골수에 들어갔다”고 육필로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장선생이 공조좌참판으로 재직하던 1433년(세종 15) 52세로 세상을 뜨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기를 '공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두터우며 자신의 몸을 공손히 해 다른 사람에게 거스름이 없었다'고 했다.

학문과 서예에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친신(親臣) 암헌 신장선생의 탄생지인 소두곡마을 동쪽 경주김씨 수은공파 단소에 고령신씨 후손과 수은공파 후손이 힘을 모아 선생의 탄생유허비를 600여년이 흐른 지난 2017년 4월 20일 건립했다.

남원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학문에 정진하고 과거급제 후 남원을 떠나 조정의 주요한 관직에 있었지만 그의 흔적은 남원의 기록 어디에도 없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후손들의 뜻을 모아 탄생유허비 건립으로 다시 부활하는 암헌 신장선생의 행적이 새롭게 조명 받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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