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

조선시대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곳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한다. 

그래서 하마비는 대부분 궁궐, 종묘, 성인 등의 사당이나 묘소앞에 세워졌고 문무와 충의 성현들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던 조상들이 어떻게 예를 갖추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

1413년 태종 13년 예조의 건의에 의해 처음에 나무로제작되었고 이후에는 석비로 세웠는데 전면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글씨를 새겼다. 

여기서인(人)과 원(員)은 모두 사람을 지칭하며 지위에 따라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이하는 30보 거리를 두고 내려야 하는 규율이 있었다.

남원에는 4기의 하마비가 있는데 공자의 위패를 비롯해 중국의 성인과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배향하고 있는 남원향교와 운봉향교 입구에 세워져 있다.

남원향교 하마비 전면에서 ‘大小人員皆下馬’이라 각자되어 있고 뒷면에 ‘庚辰正月日’이라 새겼다. 

남원향교가 세워진것은 1410년 경인년이다. 
따라서 본래의 하마비가 아닌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남원향교가 여러차례 옮겨졌고 또 정유재란 때 소실되는 등 수난의 시간을 빼면 지금의 하마비는 1640년 아니면 1880년으로볼 수 있다.

남원향교와 같은해 창건된 운봉향교 또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 1640년이다. 
이전에 4차례나 향교가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본래의 비는 없어지고 지금의 하마비는 근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자연석에 하마비라고 각자하고 세운 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세번째 하마비는 사매면 수동마을 삭녕 최씨 구선대(九仙臺) 뒤에 있다. 
비 전면에 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라고 새겨져 있고 삼계공 최언수(崔彦粹)와 관련이 있다. 

최언수는 최항의 후손으로 1537년(종중 32)천사별시 문과에 급제, 한림과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윤형원과 보우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들을 내쳐 정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글을 올린 뒤 남원으로 퇴거하여 영모당을 짓고 망북대를 세워 멀리 임금이 계신궁궐과 선영을 향해 조석으로 예를 갖추고 김인후, 정지운 등과 교제했던 인물로 예학을 강론하고 충절을 생활하다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으로부터 이조참판을 겸 홍문관 제학이 증직되었고 구례군 용방면 방산서원에 윤효손, 윤위, 최연, 이경석과 함께 배향되었다.

네번째는 남원시 송동면 손동마을 좌측 손와재(遜窩齋) 입구에 세워져 있다. 
전면에 하마비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하마비는 본래 마을 앞에 있었으나 도로를 개설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설하였다.

손동마을은 예부터 5효3열을 나온 곳이라 하여 효와 열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파릉군 이경의 별묘가 있던 곳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4기의 하마비는 옛 성현과 남원의 충과 학·효에 바탕을 두고 세워졌을 것이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왔던 사물에 대한 시선이 집중되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 묘미가 문화유산속에 숨쉰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