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선생안 심의겸(전북도청)
관찰선생안 심의겸(전북도청)
관찰선생안 심의겸(전북도청)

 

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선조 8년(1575) 동서분당의 주역이다. 대사헌과 개성유수를 지내고 선조 10년(1577)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으며, 선조 15년에는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동인이 득세하면서 파직되어 파주로 낙향해 살다가 53세에 졸하였다.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은 청송심씨로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53세로 졸하였다. 그의 자(字)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ㆍ간암(艮菴)ㆍ황재(黃齋)이다. 

그의 6대조가 세종의 국구(장인)로 영의정을 지내고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심온(沈溫)이고, 5대조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심회(沈澮)이다. 할아버지는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이다. 

아버지는 명종의 국구 영돈령부사 심강(沈綱)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 이대(李?)의 딸이다. 8남 3녀 중에 둘째 아들로 9촌 숙부(삼종숙) 감찰 심홍(沈泓)에게 입양되었다. 그의 누이가 명종비 인순왕후이고, 이조 전랑직을 놓고 논란이 되었던 심충겸(沈忠謙)은 그의 아우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해평윤씨 윤두수(尹斗壽)와 사돈지간이었으며, 인조의 외할아버지(추존된 원종의 국구) 능성구씨 능안부원군 구사맹(具思孟)과도 사돈지간이었다. 심의겸의 딸이 윤두수의 아들 윤훤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심엄은 구사맹의 딸에게 장가갔다.

심의겸 가문은 명문 중의 명문이다. 송시열이 지은 심의겸 비문에, “대개 심씨가 귀하게 드날려 여타 가문보다 특이했으므로 조부 충혜공(심연원)이 성(盛)해서 넘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손자들의 이름에 ‘겸(謙)’ 자를 달았고 공도 또한 자호(自號)를 손암(巽庵)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겸손할 ‘겸(謙)’자이고, 공손할 ‘손(巽)’자이다.

▶선조 8년 동서분당의 주역

심의겸은 일찍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종 10년(1555) 21살 때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종 17년 28살에 별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했다. 문과 급제 전체 석차는 25명의 전체 급제자 중에서 3위[탐화(探花)]이다. 과거시험 1등은 장원, 2등은 아원(亞元), 3등은 탐화라고 한다.  

문과 급제 후 청요직에 올라서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명종 18년(1563) 외숙 이양(李樑)이 사화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숙청하려고 하자 왕의 밀지를 받아 이양을 탄핵하고, 유배토록 하여 사림들을 보호하였다. 이후 승지, 대사간, 이조 참의 등을 지내면서, 척신 출신이지만 사림들 사이에 명망이 높아 선배 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조 참의로 있을 때 김종직 계통의 신진세력으로서 김효원(金孝元)이 이조 정랑으로 천거되자 그가 척신 윤원형의 집에서 기숙한 사실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선조 7년(1574) 결국 김효원이 이조 정랑에 발탁되고, 이듬해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조 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나서서 전랑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하였다. 

마침내 선조 8년(1575) 선배 사림들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 신진 후배 사림들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이라 하여 조정이 동서로 분당되었다. 이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조선은 당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조 전랑직과 사림정치

이조 전랑(銓郞)직을 놓고 조정이 동서로 나뉜 것은 이 자리의 중요성과 관련된다. 전랑은 인사에 관여하는 낭관이라는 의미로 이조와 병조의 낭관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일컫는다. 당시 논란이 된 것은 이조 정랑 자리이다.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조선의 관직체계에서 정랑 5품은 하위직에 속한다. 그럼에도 이 자리를 놓고 조정이 둘로 나뉜 것은 이조 전랑이 대간을 비롯해 하위관료들의 인사를 제청하는 통청권(通淸權)이 있기 때문이다. 견제권을 가진 대간들을 장악할 수 있는 자리가 곧 이조 전랑이었다.  

그러나 동서분당이 이조 전랑이라는 불씨에 의해서만 야기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선조대 사림정치가 열리면서 외척의 정치참여를 놓고 의견이 갈린 것이 그 배경이 되었다. 100년간에 걸친 네 번의 사화를 통해 훈구를 제치고 신진세력인 사림이 선조대에 이르러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 사림정치 이상에는 외척이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되었다.

그런데 심의겸은 외척이면서 사림들에게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해서 외척은 정치에서 배제해야 하지만 심의겸은 예외로 하자는 선배 사림과,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는데 심의겸도 예외일 수 없다는 후배 사림간에 갈등이 야기되었다. 이런 갈등에 이조 전랑 문제가 불씨가 되어 선배 사림은 동인으로 후배 사림은 서인으로 분당되었다.  

▶전라감사와 전주부윤 역임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은 같은 종2품이다. 하지만 서열상으로는 전라감사가 위이다. 대체로 17세기 현종대 이후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하고 전주부에 실무를 위해 판관이 별도로 파견되어 전주판관이 실질적인 전주부윤 역할을 하였다. 심의겸이 전라감사에 임용될 때는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이 따로 임용될 때이다.

『선조실록』, 선조 10년(1577) 9월 1일조에, “개성 유수 심의겸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라고 나오며, 전라감사 명부인 『호남도선생안』에 선조 10년 9월에 도임하였다고 되어 있다. 도선생안에 이임 시기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후임감사가 이듬해 선조 11년에 부임한 것으로 보아 이때 심의겸도 이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전라감사는 신임과 후임이 대면해서 교귀식을 행함으로써 서로 임무 교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파직이 되어도 교귀식 전까지는 전라감사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새로 임용되어도 교귀식 전까지는 감사로서 권한이 없다. 

그가 전라감사로 재임 중이던 선조 10년 말, 『선조실록』의 선조 10년 12월 23일조 기사에 보면, 양남에 전염병이 심하게 돌아 사람과 가축이 죽어나갔다. 이에 중앙에서 시종신이 제를 지내려 내려오다가 인종비 인성왕후의 국상을 만나 돌아갔다. 전염병이 절박해져 다시 내려가 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국상 중이라서 제를 지낼 때는 평상복인 흑단령을 입고, 길거리를 다닐 때는 상중에 입는 흰옷에 오사모를 쓰게 했다. 

전라감사 역임 후 심의겸은 예조참판, 함경감사를 거쳐 선조 15년에 전주부윤으로 임용되어 이듬해까지 재임하였다. 이후 동인의 득세로 파직되어 파주에 낙향해 살다가 죽었다. 청양군에 봉해졌고, 나주의 월정서원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심의겸에 대한 송시열의 평

김효원은 심의겸의 부음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친구를 잃었구나’하고 이틀간 좌기(坐起, 출근하여 업무를 봄)를 파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다고 한다. 훗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심의겸의 비문을 지으면서 동서분당을 만든 심의겸을 이렇게 평했다. 

“대개 당초에 공과 김공(김효원)의 한 때의 다툼은 모두 깊은 뜻이 없었으나 종말에 가서는 물고기가 썩어 문드러지고 하수(河水)가 터져서 넘쳐흐르듯 되어 율곡과 우계가 모두 간당(奸黨)을 위하였다고 하였는데, 나랏일의 망극한 지경에 까지 이르도록 함이 어찌 두 분의 본 마음이리요? … … 

아! 나는 오히려 선배들의 풍류(風流)가 이와 같이 순후(淳厚)하였다고 언급하였지만, 그러나 김공(김효원)은 난리 중 창황할 때 하찮은 일 때문에 청선(淸選)의 진출을 저지당하였으니, 뒤에 일을 징계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오늘날에 와서 다시 삼분 오열(三分五裂)되어 국사가 더욱 어렵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공(심의겸)의 죄이다.”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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