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오교마을의 옛 지명은 머덜, 머드리였다. 머드리는 머드러기의 방언으로 ‘과일이나 채소ㆍ생선 따위의 많은 것 가운데서 다른 것들에 비해 굵거나 큰 것’이라는 뜻이다. 또 오교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시냇물에 오동나무 교량이 있어 오교리(梧橋里)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梧)’ 자는 오동나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오기리(梧基里)’라고도 불렀다.

오교리(梧橋里)는 유등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유등면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무수리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인계면 지산리가 있다. 서쪽으로는 건곡리, 남쪽으로는 유촌리와 외이리에 접한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오교리는 화산서원이 있던 서원마을에 26명이 먹다리의 오교마을에는 414명 등 90세대에 440명이 거주했다. 2022년 11월 현재는 76세대에 113명으로 남59명, 여자 60명이 거주하고 있다. 토착 성씨로 화순 최씨(和順崔氏)와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있다. 

오교리는 풍수 형국상 ‘자봉포란형(雌鳳抱卵形ㆍ암컷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알려졌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속말이 있다. 실제 오교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시냇물이 흘러서 두 마을을 오고 가려면 다리를 건너다녔다. 다리 양쪽 시냇가에는 오동나무가 있고, 윗마을 뒤에는 대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이렇듯 마을 풍수에 따라 암컷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풍요로운 마을을 조성한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오교리 선돌은 윗마을에서 아랫마을로 건너는 다리 양쪽에 세워져 있다. 지금은 다리를 덮어 길이 되었지만, 예전에 시냇물이 흐를 때 다리를 건너기 전 길 양쪽에 세워 놓은 것이다. 다리는 윗마을의 마을 입구가 되는 곳이다. 선돌은 2기로 모두 자연석이다. 오른쪽 선돌은 높이 130센티미터(㎝), 폭 30㎝, 두께 32㎝이고 왼쪽 선돌은 높이 158㎝, 폭 90㎝, 두께 58㎝이다. 마을 풍수와 관련해 조성된 선돌로 신앙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예전에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시냇물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 위아래 마을을 오갈 때는 다리 양쪽에 있는 오동나무가 아름답고 마을 선돌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길이 포장되어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고, 선돌 2기만 옛 마을 경관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오교리 산성(합비성·성치)

순창읍에서 남원시 방면 국도 24호선을 따라가면 5킬로미터 지점에 적성면 지북리와 유등면 오교리와 경계를 이루는 태자삼거리가 나온다. 태자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가리산을 300여 미터 올라가서 다시 200여미터 동쪽으로 가면 해발 158.5미터의 산봉우리가 나온다. 오교리 산성이다. 오교리 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 보물 고적 자료(朝鮮寶物古跡資料)』에“성지(城址), 유등면 오교리 사유림 주위 약 220간(間)의 석축으로서 현재 거의 붕괴되어 주위에 전석(轉石)이 있는 데 불과하다. 성내에는 정호지(井戶址) 하나와 와편(瓦片)이 다수 산재한다. 이민(里民)은 합미성(合米城)이라 칭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교리산성은 이 봉우리 둘레에 축성되었으나 대부분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삼국시대 석성(石城)이다. 섬진강 변에 자리하면서 수로를 이용한 교통로를 감시하는 한편, 백제 역평현(현재 적성면)의 피난성 또는 치소성으로 기능하다가 후삼국 통일 후 필요성이 없어져 자연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창향지 지명과와 순창군지에는 성재(城峙ㆍ성치) 로 기록되어 있다. 오교리 북쪽 큰까끔산을 넘어 순창과 남원 간 국도변 섬진강 가 가리산 158m 높이에 돌로 쌓은 테뫼식 석성이다.

성벽 둘레는 약 250미터로 작은 규모로 산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이 비교적 남아 있는 곳은 동벽으로, 그 높이는 3미터 내외이나 대부분이 무너져 있고 기와와 토기 조각이 널려 있다. 성문은 세 곳으로 보고되었으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남동쪽과 남서쪽, 그리고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동쪽에 있는 섬진강은 자연 해자 역할을 겸했으며 강 쪽을 향해 남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암 신경준 선생 묘역

큰까끔산과 가리산 중간 산자락 중턱 너머 화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여암 신경준 선생의 묘가 있다. 화강암의 네모반듯한 대석(臺石) 위에 오석(烏石)으로 비신(碑身)을 세우고 화강암 옥개형 개석을 올렸다. 비신은 높이 115센티미터(㎝), 너비 44㎝, 두께 19㎝다. 새로 세운 비가 구비(舊碑) 옆에 나란히 있다. 신비(新碑)에는 신경준의 행적을 기록한 음기가 새겨져 있다. 구비는 글씨를 판독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나, 측면의 간지는 마모되기 시작한 상태이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종중에서 소유ㆍ관리한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ㆍ1712~1781)은 조선 영조 때 최고의 지리학자이자 실학자로 신말주 11대 손이다. 순창읍 남산마을에서 태어나 1781년(정조 5년) 70세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신경준은 문자학(文字學)·성운학(聲韻學)·지리학(地理學)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언어와 관련된 저서로는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韻解)』, 『일본 증운(日本證韻)』, 『언서 음해(諺書音解)』[동음해(東音解)라고도 함],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등이 있다. 『훈민정음 운해』는 훈민정음의 소리를 도표로 작성하여, 훈민정음의 소리를 발음 기관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지리학과 관련된 분야의 저서로는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수위(山水緯)』, 『군현지제(郡縣之制)』 등이 있다. 신경준은 조선 팔도의 산천 지리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지리서를 지을 수 있었다. 이외에 『거제책(車制策)』, 『병선책(兵船策)』, 『수차 도설(水車圖說)』,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등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저술들도 있다.

특히, 『산경표(山經表)』를 편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맥[山徑]의 갈래, 분포, 위치 등을 기록한 지리지이다. 산의 내력의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읍치(邑治)를 어떻게 둘러 있는지 등을 상세하고도 일목요연하게 표로 기록하였다. 『산경표』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 개의 대간(大幹)과 한 개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 등 총 15개의 산맥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분류하였다

『산경표』는 조선의 산맥 체계를 수계(水系)와 연결시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놓은 책으로서,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인이 분류, 명명한 산맥 구분 및 산맥 명칭 이전의 조선의 전통적인 산지 분류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화산서원

화산서원(花山書院)은 유등면 오교리에 있던 조선 후기 서원이다. 1607(선조 40)년 9월 8일 순창군 유림의 공의(公議)로 신말주ㆍ김인후ㆍ김정ㆍ고경명ㆍ김천일 등의 학문과 덕행,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 이듬해 위패를 봉안했다. 그 후 박상ㆍ유옥ㆍ신공제ㆍ양사형ㆍ김시서 등을 추가로 배향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 가운데 순창 출신 인물로는 신말주(申末舟)와 그의 손자 신공제(申公濟), 김인후(金麟厚)와 그의 6세손 김시서(金時瑞), 그리고 양사형(楊士衡) 등이 있다.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ㆍ김천일은 순창군수를 역임했으며, 김정(金淨ㆍ순창군수)ㆍ박상(朴祥ㆍ담양부사)ㆍ유옥(柳沃ㆍ무안현감)은 함께 강천산 삼인대에 관인(官印)을 걸어 놓고 중종반정으로 폐출된 중종의 원비(元妃)였던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복위 상소를 올렸다. 

화산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ㆍ조선시대에 왕으로부터 서원명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받은 서원)의 전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사액서원과 같은 모든 의례가 시행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 헐어 치워 버림)되었다.

위치는 유등면 저탄(猪灘) 상(上)으로 기록되어 있다. 순창군지에 의하면 훼철되기 전 건물로는 현전(賢殿)ㆍ신문(神門)ㆍ동서협문(東西夾門)ㆍ강당(講堂)ㆍ전사청(典祀廳)ㆍ고사(雇舍)ㆍ대문(大門) 등이 있었다. 서원 터로 좌청룡 중턱에 신경준(申景濬) 묘가 있으며, 서원이 있던 야산은 지금도 서원재 또는 서우내라고 불린다. 신경준묘역 아래 섬진강가에 강상원 군수 시정에 가치양수장(적성정수장)을 만들었다. 

 

강상원 군수와 가치양수장

제 28대 강상원 순창군수(1977.05.01.∼1978.07.31)는 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순창군민의 숙원 사업이었던 가치양수장 건설 사업에 적극 나섰다. 당시 순창읍과 인계면, 유등면 일대에는 가뭄으로 식수와 농업용수가 부족했었다. 강군수는 순창고추장을 싸들고 중앙부처와 청와대를 찾아가 순창군민들의 열망과 젊은 군수의 열정으로 설명하였다. 젊은 거지군수라는 별명을 얻어가면서 예산을 확보했다. 가치양수장은 섬진강 표류수를 취수하여 오교리 큰까꿈산 서운골을 넘어가는 해발 150미터를 넘겨야 하는 난관을 돌파해야만 했다. 이에 취수탑과 취수펌프 50마력(HP) 3대와 기계관리사 1동의 취수시설을 갖추어 유등면 오교리 일대, 인계면 노동리, 지내리 일대와 순창읍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다. 1978년 양수장 건설 후에 유등정수장 또는 순창정수장으로 불렀다. 순창읍 남계리에 정수시설과 급수 보조공, 지하수 8공으로 순창읍 순화ㆍ남계ㆍ가남ㆍ신남리에 식수를 공급했다. 섬진강 물줄기를 끌어 올려 주민 식수를 오염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화도시 순창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오교마을 정려와 효열비

화순 최씨 효열비 정려(和順崔氏 孝烈碑 旌閭)는 오교리 화순 최씨 가문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오교리 북쪽 도리산 산기슭에 있다. 재각 안에 비석 2기가 있고, 인근에 석정려 2기가 있다. 최영국 효행비와 최윤문 처 김해김씨 효열비는 비석 형태이며, 최길영 처 김해김씨 효열지려와 최문석 처 안동권씨 효열각은 석정려(石旌閭) 형태다. 모두 오교마을에 있다. 순창=이홍식 기자. hslee1820@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