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 모래사장과 망주봉
선유도 모래사장과 망주봉
선녀가 누워있는 형태를 보이는 선유봉
선녀가 누워있는 형태를 보이는 선유봉
바다 위 기러기 형상을 보이는 모래톱인 '평사낙안'
바다 위 기러기 형상을 보이는 모래톱인 '평사낙안'

 

군산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차를 타고 20여분을 가면 고군산군도가 나온다

고군산군도는 유인도 16개와 무인도 46개 등 총 63개의 섬으로 이뤄져 '산들이 모여있디'는 뜻의 지명인 '군산' 이라 불리웠다.

지난 2010년 새만금 방조제와 2016년 고군산 대교의 완공으로 이제는 사람이 거주하는 유인도 다수가 육지로된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 그 중심에 선유도가 있다. 정식 행정구역으로는 군산시 옥도면 선유리. 

선유도 주민들은 선유항이 있는 1구역과 선유도 초중학교와 스카이썬라인 등이 있는 2구역, 선유도 해수욕장을 지나 어촌체험마을이 있는 3구역에 나뉘어 거주한다.

이 곳에서 약 500여명의 주민들이 어업이나 음식-숙박업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선유도에는 이씨, 김씨가 주축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며 박씨, 임씨, 고씨 등도 고루 살고 있다. 민간신앙으로서 오룡묘제, 장생제, 수신제, 부락제 등이 있었으나 전통이 단절된 상태이며, 유물 유적으로는 패총과 수군절제사 선정비의 비석군이 있다.

군산 대표 관광지중 으뜸인 선유도는 원래 군산도라 불렸으나 섬의 북단 해발 100여미터의 봉 정상의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유도라 불리게 되었다. 

선유도는 2.13km의 면적에  신시도, 무녀도, 방축도, 말도 등과 더불어 고군산군도를 이루며 군도의 중심섬이다.

선유도 전문 문화해설사를 하고 있는 편정수(65)해설사는 "선유도는 주위의 다른 섬들이 보호를 하는 형세를 보이고 있다. 동쪽으로는 신시도, 남쪽으로는 무녀도, 서쪽으로는 장자도, 북쪽으로는 방축도, 명도, 말도가 둘러쌓여 역사적으로 볼때 군사-무역의 요충지 였으며 태풍을 피하기 위한 피항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섬이었다"고 전한다.

 

우리가 흔히 관광지로 알고있는 선유도는 사실 고군산군도의 중심지이며 예로부터 서해의 중요한 군사-교역 요충지로 조선시대 수군의 본부로서 기지역할을 다했던 선유도는 수군절제사가 통제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선유도 곳곳에 깃든 역사적 향훈을 느껴봐야 선유도의 참 멋을 알수 있다.

선유도의 위치는 서해 뱃길의 최고 요지여서 예로부터 많은 배들이 오가는 주요 항로였다.

고려시대에는 여/송 무역로의 기항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고려 인종 1년인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선유도에서 20여일간 머물면서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서긍은 '신주'라 불리는 배 5척을 거느리고 고려 개경을 옴에 있어 당시 김부식이 선유도로 와서 사신들을 영접했다고 한다. 당시 송나라 사신들이 한 척당 200여명이 타고 있었다하니 사신의 수가 가히 1000여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긍은 이 책에서 신을 모시는 오룡묘와 자복사라는 큰 절, 임금의 별장인 송산행궁, 사신을 접대했던 객관 등을 언급했다. 이 책 대로라면 선유도에는 고려 조정 고관들이 외극 사신을 맞는 왕궁 규모의 시설과 절, 신당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모두 없어지고 오룡묘만이 남아있다. 최근 곽장근 군산대 교수팀이 객관의 위치와 고려청자의 파편, 하수구 등을 발굴, 문화재청에서 이 곳을 명승 113호로 지정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의 인연도 깊다.

고군산군도에는 대규모 수군기지가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군산진으로 명명된 이곳은 조선조 태조때 만호영을 두고, 이후에도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조선조 말까지 그 명맥을 이었갔다.

문헌상 이곳에는 20여 척의 군선에 1200여 명의 병력이 주둔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족까지 합치면 최소 2500여명이 거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이 전선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와서 11일동안 머물며 전열을 재정비하는 등 임진왜란 때는 함선의 정박기지로 해상요지였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적의 추적을 피해 북상해 위도를 거쳐 선유도에 도착한 것은 해전 6일 후인 9월 21일 이었다.이때 장군은 몸살로 몹시 앓았으며 가을 태풍으로 선박의 이동이 용이치 않았다. 선유도에서 11일간의 휴식을 취한 장군은 선유도를 떠난지 14개월 후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 전이라 할 수 있는 노량해전에서 54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고군산진 관청 건물은 1938년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는데, 복원까지는 갈 길이 먼 실정이다.

그 관청터 아래에는 선정을 베푼 수군절제사들의 비 5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선유도에는 그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설화들이 전해진다.

선유도에는 왕릉이 있었으며, 이를 도굴하려던 관리가 주민들의 고발로 궁지에 몰리자 야반도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문헌에는 익산 쌍릉과 함께 고군산 왕릉이 언급되고 있다.

또 고려 삼별초와의 인연도 주민들 사이에는 사실처럼 전해진다.

강화도에서 패한 삼별초가 고군산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망주봉에는 언제 새겨졌는지 모르는 '내선완인'이라는 한자가 새겨져있는데 이에대해 편정수 해설사는 " '내선완인'은 "우리 안에서 왕을 뽑자"라는 뜻인데 이는 당시 역모에 해당하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봤을때 삼별초가 이 곳에 머물면서 결의를 다지는 글였을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즉 이곳에서 왕을 새로 선출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유도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보물선이다.

문화재청은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등 해저 유물이 쏟아져 나온 고군산 해역에 대해 지난 4월 국가중요문화재, 사적 지정을 했다.

또 최근에는 유물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광범위하게 분포해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를 연장하기도 했다.

선유도 인근 해역에서는 지난해부터 난파된 고선박을 비롯해 다양한 유물이 발견됐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유물은 고려청자 125점을 비롯해 분청사기 9점, 백자 49점, 닻돌 3점 등 200여점이다.

이는 고려시대 고군산 군도가 수도인 개경으로 가는 배들의 주요 기항지였음을 증명하는 유물들이다.

실제 1872년 김제 만경현에서 제작한 '고군산 군도 지도'에는 이 해역을 '조운선을 비롯해 바람을 피하거나 바람을 기다리는 선박들이 머무는 곳'으로 기록돼 있다.

선유도의 명물인 망주봉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한눈에 보기에도 사연이 있음직한 우뚝한 두 개의 바위산. 이 망주봉에 대한 설화 또한 관심거리다.

옛날 간신들의 모함으로 선유도에 귀양 온 한 신하가 자신을 꼭 다시 불러 주겠다고 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임금을 그리워하며 매일 바위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 한다. 그래서 이 바위산 이름을 망주봉(望主蜂)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망주봉 아래로는 초승달 모양의 완만한 모래 고운 백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만조가 되어 물이 가득 차면 가득 찬대로 썰물이 져 물이 빠져나가 갯벌이 드러나면 또 그대로 보는 이들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해준다. 이 해변을 따라 예전에 는 모래 언덕이 높았었고 그 모래언덕을 따라 해당화가 무리 지어 심어졌었다고 한다. 해당화가 만발할 때면 그 향기로 선유도 일대가 흠뻑 취하곤 했다고 하는데 한 경찰지서장이 당뇨병에 특효라고 캐가기 시작한 이후, 당뇨병 환자들이 너도 나도 뽑아 가는 바람에 지금은 해당화 한 그루 볼 수 없는 민둥 모래 둔덕만 남아있어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말도(末島) 쪽으로 지는 해는 장엄하여 선유낙조(仙遊落照)라고 말한다. 소나기와 함께 생겨나는 망주폭포, 비구름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을 배경 삼아 유리알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감동으로 떨려 온다.

바다위 기러기 형상을 보이고 있는 모래톱인  '평사낙안' 이 곳에는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지난 2003년 역대급 태풍 '매미'에 의해 휩쓸려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방치돼 있다가 지난 2021년 군산시에서 팽나무 묘목 3그루를 심어 지금 새로운 볼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이외에도 망주봉, 명사십리, 또 주변 풍경이 좋아 신선들이 놀다가곤 했었다는 선유도의 최고봉인 선유봉(해발 150m)도 주요 관광자원이다.

선유도 주민들의 주소득은 바다에서 얻어진다. 약간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주로 연안어업에 종사하거나 김 양식을 하고 있는데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봄, 가을엔 소라, 새우, 멸치잡이를 하고 겨울엔 김 양식, 여름에는 휴어기로서 선유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대선(貸船)을 해서 수입을 보태기도 한다.

고군산 군도는 지금 상전벽해급의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새만금 위원회는 최근 고군산 무녀도 일대에 해양레저스포츠와 산림휴양을 할 수 있는 복합 단지 건설을 의결했다.

총 사업비 398억 원이 들어가는 이 프로젝트는 고군산 관광객의 폭증에도 불구하고 체험이나 숙박시설이 부족한 데 따른 대응이다.

이곳엔 실내 서핑장, 실내 잠수 풀, 인공 파도 풀, 카약 카누 등 해양 레저시설과 가족 캠핑장 등이 들어설 계획이다.

 

또 전북도도 고군산 군도에 관광벨트를 조성하기로 하고 이미 접안시설 확충과 도로 정비, 마을 공동체 소규모 사업 등을 시행하고 있지만 아쉬움도 있다.

관광지 개발과 더불어 역사 스토리텔링이 병행돼야 하지만 힐링 관광지로서의 역할만 부각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유서가 깊은 섬에서 먹고 즐기는 시설만 잔뜩 들어서고 무질서한 캠핑과 차박으로 몸살을 앓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지역내 역사문화 자원들을 복원하고 이를 고군산 군도의 정체성으로 널리 홍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때 전라도의 수영(水營)이 설치돼 수군절제사가 임피, 군창, 만경, 김제, 부안, 무장, 고창, 영광 등 8개군을 다스렸을 만큼 번성을 구가했던 선유도가 새로운 서해안 시대를 맞아 다시 한 번 일어서길 기대한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