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년경 해동지도 중 고부군 확대
1750년경 해동지도 중 고부군 확대

 

정읍 고부면은 시청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0.3km지점에 면사무소가 위치해 있으며 자동차로는 약 15분 정도 소요된다.고부면의 면적은 40.02㎢(정읍시 전체 면적 692.86㎢의 5.8%로서 시 관내 15개 읍면 중 5번째 크기에 해당한다. 고부면사무소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각종 편의시설이 위치하고 있는 면 소재지는 북쪽에 치우쳐 있다. 일제 강점기때인 1914년에 전국적인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지금의 고부면이 당시 고부군의 중심으로서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부는 고대 삼한 중 마한 소속이었다. 마한의 54개국중 고부지역은 ’고비리국‘, 정읍지역을 ’초산도비리국‘으로 정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으며 이때 지명은 ’고사부리군‘으로 불리었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고부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고려초기엔 ’영주‘라 칭했으며 관찰사가 파견됐을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다. 951년 ’안남도호부‘로 잠시 바뀐 지명은 현종 9년 1018년 다시 고부군으로 복원됐다.

조선 중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따르면 현재 고부초등학교 터에 이었던 고부군 관아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태인현 까지 37리, 남쪽으로 흥덕현까지 18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39리, 북쪽으로 부안현까지 17리, 서울까지는 596리 거리이다”라고 기술돼 있다.

고부면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동쪽이 높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동고서저’의 특색을 나타낸다. 동쪽은 두승산을 중심으로 산지가 발달됐고 서쪽으로 가면서 구릉지가 펼쳐지며 고부천에 이르러서 해발고도 10m이하의 평야가 나타난다.

이처럼 동고서저의 지형으로 인해 고부면 지역의 물줄기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고부천의 본류는 남쪽 노령산맥의 영향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완만하게 흐르고 있다. 하천 주변 평야는 고부천 물줄기가 오랜 세월동안 침식과 퇴적이 반복되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부천 주변 주요 경작지 해발고도는 대체로 4~6m정도이며 고부면보다 상류인 백운리에서 강고리, 관청리를 거쳐 신흥리, 용흥리 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차이가 2m정도로 물의 흐림이 완만하다. 고부천 주변이 여름이면 상습적 홍수피해가 잦은 것도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만조때는 고부천 하류 ‘하장갑문’의 수문을 막았을 때 침수 기간이 길어지면서 논농사 지역은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1861년경 대동여지도 고부군
1861년경 대동여지도 고부군
1872년 제작된 고부군 지도
1872년 제작된 고부군 지도

 

-고지도에 기록된 고부면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고부읍성과 관아 내부 건물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사진 참조)

 참고로 고부읍성에 있던 관아가 산 아래 평지(현 고부초등학교 터)로 이전한 것은 영조 41년때인 1765년이다.

이 지도에선 고부관아를 중심으로한 19개면을 자세하게 표시했다.당시 고부군의 민호가 5429호로 표기돼 있으니 가구당 평균 5명씩 계산했을 때 2만70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으로 추정된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 무렵 제작한 ‘대동여지도’에서는 두승산을 비롯해 계동산, 망제산, 수광산, 천태산, 백산 등이 표현돼 있다. 두승산에는 두승산성의 존재가 표시돼 있기도 하다. 대동여지도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것은 ‘눌제’라는 저수지이다. 눌제는 김제 벽골제와 더불어 삼한시대에 조성된 저수지로서 이 고을의 랜드마크이다. 

이 지도에 따르면 백산 근처 고부천 하류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일명 바다창고라 불리는 ‘해창’이 표시돼 있다. 아마 이 지역의 곡식을 여기에 모아두었다가 동진강과 황해를 이용한 뱃길을 통해 한양으로 운송했었을 것이다.

1872년 ‘군현지도’(사진 참조)에 따르면 고부관아가 위치한 곳은 지형상 ‘분지’에 해당되며 분지 안의 물길은 서쪽을 향하는데 이는 고부천이 위치한 서쪽의 고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고부 관아가 영조때 성황산 아래로 이전함에따라 성황산이 이 지역의 주산 역할을 하게 된다. 성황산은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성황산 동쪽 봉우리에는 성황당이 위치해 있었다. 썽황당은 원래 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신당이다. 성활산 북쪽에는 ‘여단’이라는 제단이 있었는데 이 여단은 고을의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주던 제단이다. 또 산 서쪽에는 ‘사직단‘ 이 표시돼 있는데 사직단은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하지만 이 제단들은 현재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안은 실정이다.

-풍수지리로 본 고부면

풍수지리학적으로 고부면은 대부분의 마을들이 산간부와 평야가 만나는 ’점이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른바 ’배산임수‘의 조건을 나타낸다. 산에서는 임산물을 구하고 들에서는 농작물을 경작-수확하는 유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고부천 주변의 너른 평야지역에서는 집증호우나 수해를 피하기 유리한 구릉지에 마을을 조성하는게 매우 중요한 입지조건이라 하겠다.고부면의 마을들은 이러한 조건을 우선으로 산지의 하단부나 구릉지에 입지했으나 행정구역상 백운리에 속해있는 ’용수마을‘은 들한 한 가운데 조성된 마을로서 홍수에 매우 취약해 지금은 거의 폐촌이 된 마을이다. 수헤에 취약한 조건임에도 불구, 이 곳에 마을을 형성한 것은 경작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수해의 위험성보다 더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부면엔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용‘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 흔히 ’용‘은 산 능선의 이어짐을 뜻한다. 또한 농경문화권에서는 ’용‘을 물에 비유하기도 하고 산이 평야를 만날 때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고부면에서 ’용‘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용흥리 용흥과 신용‘ ’신흥리 용회‘ ’관청리 청룡‘ ’강고리 용등‘ ’북운리 운용-반용-용반-용리-용수마을‘등이다. 이 마을들의 지리적 공통점은 고부천 인근이며 대체로 구릉산 산지로 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풍수와 관련, 많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부향교지‘에 의하면 원래 고부향교는 읍성이 있던 성황산의 서쪽 기슭에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지고 선조 30년인 159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술사들에 의하면 이 향교의 기운을 악이 누르고 있어 향운이 쇠퇴,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고부향교의 터가 관아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지역의 운이 막힌다는 설이 있어 당시 유림들의 발의로 영조 41년인 1764년 고부관아를 지금의 고부초등학교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지금 고부면사무소 앞에 있는 ’군자정‘에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33호인 군자정은 원래 원못으로 둘러싸인 누정으로서 이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군자정이 만들어진 연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못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중엽 이후 고부로 부임온 군수들이 채 1년도 못 채우고 좌천이나 파직을 당하는 경우가 많고 지역 인재가 나오지 않아 장원에 급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군자정이 황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현종 14년인 1673년에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후선이 연못을 파내고 군자정을 수리하니 연꽃이 스스로 피어나고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인재가 계속 나왔단다.

-고부면의 저항정신

당시 인근 태산군과 정읍현은 1018년 고부군에 속해있었으며 현령보다 낮은 직급인 ’감무‘라는 관리를 파견해 다스렸다. 고종 22년인 1235년에는 몽골군이 이 지역까지 침입해 약탈행위가 잦아지자 ’부령별초‘였던 전공령이란 사람이 의병을 모집해 맞서 싸우기도 했다. 이 지역의 풍요로움이 몽골에까지 알려졌다는 증거일게다. 약탈로 인해 의병들의 저항정신은 지역을 지키는 초석이 되기도 했다.

이 저항정신은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까지 이어지는데 고부 지역민들이 왜적에 대항해 전투에 참여한 유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국가 관료로서 관군이 되어 왜적 토벌에 나서는 장군과 병사들이었다. 송상현, 신호, 배흥립 장군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발령을 받기전에 정읍현감으로 1년2개월 근무를 하며 인연을 맺은 신호, 배흥립, 송여종, 이대축은 참모장 역할을 충실히 하며 연전연승을 이끌었다.

두 번째는 고부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의사와 의병들이다. 의병장과 의사로서 공을 세운 김제민, 김흔, 이경주, 이경국, 이시화 등과 같은 인물들이다. <2부 ’동학농민혁명과 고부‘편 계속>    

  /최병호기자.hoya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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