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유고(국립한글박물관)
송강유고(국립한글박물관)
송강집(한국가사문학관)
송강집(한국가사문학관)
진천 송강사(도기념물, 문화재청)
진천 송강사(도기념물, 문화재청)

 

▶대사헌을 사직하고 창평으로 낙향

정철(鄭澈)은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1582년 도승지에 임용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도승지는 국왕의 비서기구인 승정원의 수장으로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 같은 자리인데, 정철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도승지직을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 당시 사헌부에서, “도승지 정철은 술주정이 심하고 광망(狂妄)하니 체직시키소서”라고 탄핵하였다. 정철은 몇 달후 함경도관찰사에 임용되었다.

1583년 정철의 나이 48세 때 예조판서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번에도 사헌부에서 술주정을 문제 삼아 임용을 반대하였다. 정철에 대한 논박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사직하였다. 곧이어 선조 17년 대사헌에 임용되었는데 동인들의 반대로 사직하였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우두머리로 감찰권의 수장 자리이다. 이처럼 정철의 관직생활은 동서분당 하에서 순탄치 못했다. 술을 좋아한 것이 동인들에게 논핵의 빌미를 주었다.    

정철은 1584년(선조 17) 49세 때 대사헌직을 사직하면서 전라도 창평(현 담양)으로 내려왔다.  이후 4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창평에 은거하였다. 이때 그의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사미인곡」ㆍ「속미인곡」ㆍ「성산별곡」과 시조와 한시 등 많은 작품들을 썼다. 담양(潭陽)의 송강정(松江亭)은 이때 초막을 짓고 생활한 곳으로, 후손들이 이를 기념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옆에는 ‘사미인곡 시비’가 서있다. 

정철은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면 창평(昌平)으로 내려갔다. 창평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많은 세월을 여기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고향같은 곳이요, 단단한 인맥으로 구축된 후원처였다. 스승 광산김씨 김윤제, 처가 월구실유씨는 정철의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다. 창평 주변으로는 정철의 할머니가 광산김씨이고, 둘째 형 정소(鄭沼)가 을사사화 후 순천으로 내려와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형수가 살고 있었으며, 셋째 형 정황(鄭滉)은 김제군수를 지냈다.

▶우의정으로 복직하여 정여립 사건 추국 주관 

임진왜란 발발 3년전인 1589년(선조 22) 10월에 전주출신 정여립이 모역을 도모했다는 고변이 황해도에서 올라왔다. 정여립은 모역자로 몰려 진안 죽도에서 죽고, 이 모역에 가담했다는 자들이 잡혀와 국문을 받고 처벌되었다. 

이해가 기축년이어서 이 옥사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정여립 모반사건, 기축옥사는 당시 정권에서 열세이던 서인들이 정국운영의 주도적 위치에 있던 동인들을 타도하려는 옥사로 확산되면서 3년간에 걸쳐 동인 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선조 8년 동서분당 후 최초의 대옥사이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국에서 호남사림들의 위상이 약화되었고, 전라도 출신들의 중앙 진출이 억제되었으며, 전라도 향촌사회는 동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에도 당색에 따라 진위여부를 놓고 시각에 차이가 있고 현재도 학계에서 역모가 실재했다는 설과 당쟁의 산물이라는 날조설이 맞서 있다.

필자는 지난해 말 전라도 지역학 차원에서 정여립사건에 관심을 갖고, 전북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이 사건을 규명한 단행본을 간행한 바 있다.(이동희, 『조선시대 정여립모반사건과 전라도』,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2022) 정여립 사건은 국가사적 차원에서 만이 아니라 전라도 지역사적 차원에서도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정여립 사건은 창평의 생원 양천회의 상소가 올라오면서 조정의 중신들까지 연루되어 국문을 받고 처벌되는 상황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정국 하에서 낙향했던 정철이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추국을 관장하는 위관이 되었다. 당시 정철은 아들의 상을 당해 경기도 고양에 있었다. 

정철이 위관으로 있으면서 전주출신 우의정 정언신과 이조참판 정언지 형제, 남평(담양)의 이발과 이길 형제, 진주의 최영경 등 많은 동인들이 죽어나갔다. 훗날 선조는 최영경의 죽음을 놓고,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고 하여, 정철을 독철이라 하였다. 그러나 옥사의 최종 결재권자는 선조라는 점에서 정철도 선조의 희생양이라는 시각이 있다.     

▶정치적 라이벌 남평의 광주이씨 이발

전라도 남평의 이발과 창평의 정철은 라이벌이었다. 이발은 동인의 영수요 정철은 서인의 영수이다. 나이는 정철이 8살 위였다. 이발의 광주이씨 집안은 광주에서 살다가 이발의 아버지 이중호 때 남평으로 이주하였다. 이 광주이씨 집안은 10대에 걸쳐 문과급제자가 연이어 나와 ‘십대홍문(十代紅門)’으로 칭송된 호남의 대표적 명문이었다. 이발의 외가 또한 호남의 대표적 명문인 해남윤씨로 외조부 윤구는 기묘명현으로 호남삼걸이라 불렸다.

정철이 위관으로 있으면서 이발과 이길형제는 유배를 갔다가 다시 잡혀와 국문을 받고 죽었다. 이발, 이길, 이급 3형제가 모두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죽는 등 이발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선조 24년에는 이발의 80된 노모와 10살 아들도 잡혀와 추국을 받고 승복하지 않은 채 죽었다. 이발의 문생들과 노복들에게도 모두 엄형을 가했으나 한 사람도 자복하지 않았다. 이발과 이길형제는 1624년(인조 2)에 복권되었다.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잡혀와 죽은 것은 정철이 위관을 그만둔 이후이지만 이발 집안의 몰락과 정철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이발 집안은 대대로 정철 집안과 혼인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발 집안의 여인들이 도마에 칼질을 할 때 ‘철철철’한다고 한다. 고려말 충신 최영에게 제를 지낼 때 올리는 돼지머리를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를 뜻하는 ‘성계육’이라고 한다는 것과 같다.  

정철과 이발의 어릴 적 이야기도 전한다. 정철과 이발이 재를 사이에 두고 살았으며 친했다. 하루는 이발이 친구와 바둑을 두는데 정철이 훈수를 두었다. 화가 난 이발이 정철의 수염을 뽑아 버렸다. 그런데 정철이 화를 내지 않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돌아갔다. 이를 본 종자가 이발의 모친에게 고하자, 모친이 ‘아이고 우리집 망했다’고 하였다. 화를 냈으면 거기서 풀린 것인데 웃었다는 것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선조의 후계자를 세우는 건저의 사건으로 유배  

정철은 기축옥사를 다스리고 이듬해 선조 23년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정철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591년(선조 24), 정철의 나이 56세 때 선조의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 사안을 건저의(建儲議) 사건이라고 한다. ‘건저’란 곧 세자를 세운다는 뜻이다.

당시 선조의 나이가 40세로 정비 소생 왕자가 없었고 후궁 소생들이 있었지만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서인 정철은 동인 이산해, 유성룡 등과 함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이산해는 빠지고 유성룡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정철 홀로 세자 책봉을 요청하였다. 

선조는 이 요청에 격노하였다.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 국왕 스스로 알아서 하면 문제가 없지만, 신하들이 이를 요청하는 것은 국왕에게 죽을 때가 되었으니 다음 왕을 세우라는 말로 들려 국왕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다. 아버지가 왕이 아니어서 정통성이 취약한 선조로서는 더욱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철이 이를 건드린 것이다. 

선조가 정여립 사건에서 그랬듯이 이를 기회로 활용하여, 기축옥사로 세력이 커진 정철을 꺽으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한 후계구도와 달라서인지 정철을 파직시키고 유배형에 처했다. 당시 선조는 인빈 소생 신성군을 아꼈고, 신하들은 광해군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듬해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 선조를 호종하였다. 양호체찰사를 지내고 1593년 명나라 사은사로 다녀왔다. 정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왜군이 다 물러났다고 잘못 보고하였다고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11월에 체직되어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으로 물러나 있다가 12월에 58세로 별세하였다. 

서인들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그의 졸기에는 술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이 실록에 정철은 중년 이후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였다고도 하였다. 정철은 처음에 경기도 고양 송강마을에 묻혔는데, 송시열의 권유로 충북 진천에 이장하였다. 정철의 묘소와 사당 송강사, 송강기념관 등이 진천에 있다.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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