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도선생안(전라감사 이광)
호남도선생안(전라감사 이광)
웅치전적비
웅치전적비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이광은 두 번에 걸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그것도 중차대한 시점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역사건이 일어났을 때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라감사였다. 임진왜란 초 전라감사로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용인에서 대패하여 비난을 받았지만 웅치전과 전주성 수호의 최고 책임자로 전라도를 보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데, 외가가 전라도 고부이며 말년에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   

▶ 덕수이씨 좌의정 이행의 손자

전라감사 이광(李洸, 1541∼1607)은 본관이 덕수로, 덕수이씨 우계공파의 파조이다. 자(字)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雨溪), 우계산인(雨溪散人)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추부 도사 이원상(李元祥)이며, 어머니는 전라도 고부에 세거한 평산신씨 동부승지 신옥형의 딸이다. 부인은 덕산이씨(德山李氏) 청주목사 이증영(李增榮)의 딸이며, 3남 1녀를 두었다. 

본관지인 덕수는 경기도 개성 지역의 옛 지명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율곡 이이가 덕수이씨이다. 이광과 율곡은 8촌 삼종제로, 고조부를 같이하는 동고조 8촌 한 집안이며, 이순신 집안과는 이광의 10대조 이소(李?)에서 가닥이 갈린다. 이광은 이순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광의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행(李荇)이다.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로 용재 선생(容齋先生)으로 불렸다. 조광조의 배척을 받아 좌천되자 충청도 면천으로 낙향하였다가 기묘사화 후 벼슬에 나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의 책임자로 임무를 마치고 좌의정에 올랐다. 이행은 김안로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이광의 큰할아버지가 을사사화 후 영의정에 오른 권력자 이기(李?)이다. 이기는 장인이 뇌물죄를 저질러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다가 중종의 신임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인종 즉위 후 윤임일파의 탄핵으로 병조판서로 강등되었다가 을사사화 때 윤원형과 함께 윤임일파를 제거하고 보익공신 1등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기의 훈록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되었다. 

▶『목민심서』에 실린 청렴한 관리

이광은 1567년(선조 즉위년) 27살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4년(선조 7) 34살 때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학유를 거쳐 전임사관인 예문관 검열에 임용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대하고, 성균관 전적, 병조 좌랑 등을 지냈다.

강원감사의 시종관으로 임용되었을 때, 병을 핑계 대고 부임하지 않다가 탄핵을 받고 규정에 따라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서용되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다. 당시 이조판서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선처를 아뢰어 용서를 받았다. 

이광은 문무를 겸한 인물로, 북방에 오랑캐들이 발호하자 1583년(선조 16)에 수령으로서 장수를 보좌할 만한 인물로 뽑혀 북청 판관에 임용되었다. 바로 이어 감사의 막료로서 기무(機務)를 도와 처리하는 일이 더 중하다고 하여 함경도 도사에 임용되었다. 이후 영흥부사, 길주목사 등을 지내고 1586년 함경감사에 올랐다. 오랜 기간 북방에서 벼슬 생활을 하였다. 

이광은 청렴한 관리였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해관(解官)」 제2조 귀장(歸裝)조에 그의 일화가 실려 있다. 그가 영흥부사로 있다가 길주부사로 떠나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책보따리뿐이었다. 부민들이 녹피(鹿皮) 수백장을 가져가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한 장만 받았다. 길주를 떠날 때 그것마저도 관의 창고에 넣어두고 갔다.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순신을 조방장으로 임용

이광은 1589년(선조 22) 1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 북첩의 기생을 데려와 도내의 농장에 두었다고 하여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년 2개월 정도 전라도 최고 통치행정권자로 전라도 일도를 다스렸다.

그는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순신을 군관으로 삼았으며, 이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올렸다. 이순신은 조방장으로 있다가 그해 12월에 정읍현감에 임용되었다. 이순신의 발탁을 논할 때 유성룡의 천거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에는 이광의 역할도 컸다. 

이순신은 이광에 의해 전라도 조방장으로 발탁되어 있다가 정읍현감에 임용되었으며, 유성룡의 천거로 몇 단계를 건너뛰어 전라좌수사에 임용되었다. 이광이 이순신을 군관과 조방장으로 발탁하여 성장의 기반을 만들었다. 

▶정여립의 사건 연루자 처결

이광이 전라감사로 부임하던 해 1589년 10월에 정여립 역모사건이 중앙에 고변되었다. 정여립사건은 3년간에 걸쳐 동인 천여 명이 희생된 동서분당 후 최대 옥사이다. 정여립과 이광은 1567년 같은 해에 생원시에 동방합격한 사이이다. 

정여립사건이 발발했을 때 정여립의 문생과 그 도당을 전부 잡아들이라고 명이 내려오자 경중을 가려 중한 자는 보고하고, 가볍고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자들은 석방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 덕분에 살았다. 나중에 논공행상할 때 자헌대부에 올랐으나 대간이 이를 문제 삼아 삭직되었다. 

▶문무를 겸비해 두번째 전라감사 부임  

1591년(선조 24)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호조참판을 지내고 또 한 차례 전라감사에 임용되어 그해 3월에 부임하였다. 이광이 전라감사로 임용될 때 조정에서 일본의 침공을 대비해 전라감사를 엄선했는데, 그 적임자로 비변사에서 그를 단망으로 천거하였다. 당시 비변사에서 이광 외에 의망한 사람이 없었다. 전라감사 1년 임기를 채우고 연임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근왕병 수만 명을 모아 북상하였다. 공주에 이르렀을 때서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에 선조가 몽진하자 군사들이 놀라고 동요되어 이광의 만류에도 칼을 빼 길을 트고 가버렸다고 하였다. 

이광은 5월에 다시 2차 근왕병을 모아 충청감사, 경상감사가 이끈 군사와 함께 삼도근왕병이라고 일컫고 북상하여 수원에 주둔하였다. 6,7만 명의 군사로 그 위용이 대단했으나, 6월 용인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하고 전주로 돌아왔다. 

▶웅치전과 전주성 수호의 최고 책임자

이광이 전주로 돌아왔을 때 일본군은 진안을 넘어 전주성을 침공하려고 하였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웅치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며 이광이 군사를 보내 지원하였다. 이틀간의 혈전으로, 비록 패했지만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혀 전라도를 보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라감사 이광은 웅치를 넘어 전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이정란을 수성장으로 삼아서 전주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남고산성으로 가서 적을 방어하였다. 이에 왜병이 전주성을 넘보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광은 용인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웅치전과 전주성 방어의 최고 책임자로 호남의 수부 전주성을 지키고 전라도를 보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말년에 외가인 전라도 고부로 내려와 생활

이광은 용인에서의 패전으로, 1592년 8월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전라감사직에서 파직되었다. 백의종군의 명이 내리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었다가 1594년에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왔다.

그는 만년(晩年)에 외가인 전라도 고부 우일향(雨日鄕)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우일향은 일명 우계(雨溪)라고도 하는데, 외가인 평산신씨가 대대로 여기에 살았다. 이광은 우계산(雨溪山)을 사랑하여 죽어서도 우계산에 묻히길 원했고 그의 호 우계도 여기에서 따와 자호(自號) 하였다. 택당 이식이 지은 이광 행장에 이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광의 출생지도 외가인 우일향이다. 묘소는 충청도 면천군 창택리 선영에 있다. 1633년(인조 11) 대례(大禮)에 따른 사면령이 반포되자 아들들이 상소하여 복권되었다. 저서로 『우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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