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석 문학박사, 전주전통문화연수원장

오래된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문화 강국과 환경을 중시하며 농생명 산업을 기반으로 한 선진국의 칭호는 이 시대 모두의 바람이다. 전통문화는 현시대 가치의 연원(淵源)을 밝히는 데서 계승될 수 있고, 환경은 생산력보다 처지를 고려하며 함께 이루어 나가는 공동체성을 중시할 때 지킬 수 있다전라북도가 전통문화와 농생명 산업의 중심도시인 근거를 확보하고 이를 산업화로 계승해 나갈 구체적 방도를 실천한다면, 승자독식의 자본 집약적 산업과 우울증이 증가하는 초경쟁사회와는 약간 거리를 두며 문화와 환경을 중시하는 친환경 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이러한 구상이 내년부터 시행될 전북특별자치도의 비전에 담긴다면 다른 자치단체와 차별화된 문화예술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고, 전북특별자치도의 수장은 명실 공히 대한민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지사의 지위를 확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바람을 바탕으로 전라감영을 활용한 전북문화예술관광 부흥 전략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이고 조선 왕조의 본향이다. 왕기가 서려 있다는 것은 산수 토지가 수려 비옥하고 민심이 천리를 따르며 능동적이라는 함의가 있다.

견훤왕이 완산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정할 때(900)부터 인구가 많고 농업과 해상무역이 왕성했던 완산주의 사람은 이미 신라와 대립각을 세웠고 신라는 고려와 손잡고 견훤왕을 견제하였다. 이에 견훤왕은 927년에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시키며 고려의 원군까지 물리쳤으나 후백제는 930년 고창(안동)전투에서 고려에 대패하면서 양국의 전세는 급격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견훤이 장남 신검이 아닌 4남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면서 장남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권력을 장악하자 견훤은 고려로 피신하였다. 이때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항복을 하며 나라를 넘겨주었다(935). 왕검은 견훤과 함께 신검을 공격하여 신검의 항복을 받아내며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그러나 고려는 1231년 몽골군의 첫 침략부터 6차례의 침략을 받아 진도(珍島)를 거점으로 삼별초(三別抄)가 끝까지 저항했으나 국토는 황폐화되고 끝내 원()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356년 공민왕이 원나라 세력을 물리치고 부패한 권문세족을 처단하는 개혁 정치를 시작하였으나, 국내외 모순이 심화된 고려는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공양왕을 세우고 사회모순의 척결을 꾸준히 주장해 온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들과 조선을 건국(1392) 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전주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 예우를 받게 되어 경기전을 창건(1410)하게 되고 전라도의 수부(首府)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전라감영 등을 두게 되었다. 이후 1910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전라감영에 부임한 감사는 497명으로 파악되고 있고, 조선 시대 전라 감영터를 중심으로 경기전, 동헌, 향교 등 관련 관청건물과 음식문화가 남아 현재 전주한옥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주는 천여 년 전부터 일국의 왕도로 기능할 수 있는 인물과 자원이 풍부하였던 만큼 후삼국시대 외적으로는 신라, 고려와 숙명의 저항과 견제의 관계에서 고려에 복속되기도 하고, 내적으로는 여러 모순 속에서도 끊임없는 자립과 저항 정신으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항정신 보다는 언제부턴가 전라도 인재가 중앙무대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되었고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으로 의기소침해졌고 이의 근거는 훈요 10조라고 여기고 있는데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늙자 왕실의 후손들이 감정과 욕망에 치우쳐 나라의 기강이 어지럽히지 않을까 염려되어 태조 26(943)에 왕실 유훈으로 제정된 것이 훈요 10조이고 그 제8조에 있는 특정 지역의 인물을 등용하여 쓰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훈요 10조에 언급된 특정 지역은 아래와 같이 잘못 해석되었다고 역사학자 이희권 교수가 일찍이 논고하였다.

 

논쟁이 되고 있는차현이남 공주강 외(車峴以南 公州江外)’의 해석은 차령산맥과 금강 이남지역이 아니라 태조가 고려 초기에 고려에 저항하는 성향이 강하였던 차현(車峴) 이남 공주 강 이북의 공주, 연기, 청양, 청주 지역 인물들의 등용을 억제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훈요 10조를 전쟁 중에 잃어 버렸다고 밝힌 최승로 열전을 근거로 그 시기를 현종2(1011) 거란의 제2차 침입 때로 추정하며 이후에 나타난 훈요 10조는 개작(改作)되었고, 조선 시대에 금강 이남의 산천 배역(背逆)설이 성호사설택리지등에서 논의되면서 역사적 편견과 자의적 풍수지리설에 의한 호서, 호남 사람에 대한 기피설이 확대 심화되었다.(훈요 십조와 전라도, 2005)

 

그럼에도 아직도 전라도를 깎아내리는 전거로 훈요 10조를 들먹여도 말을 못하고 피해의식까지 있기도 하는데 이를 극복하고 역사 속에서 전북의 정체성은 진취적 저항성과 낙천적 풍류성이 있음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훈요 10조의 진위(眞僞)나 오해(誤解) 논쟁 속에서 드러난 것은 고려 중기까지 호서, 호남 사람에 대한 중앙정치무대 진입의 차별이 없었다는 점이고, 태조 왕조의 뒤를 이은 혜종이 나주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훈요 10조가 개작되었다는 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선조 22(1589) 대동사회를 꿈꾸며 촉망받던 정여립이 석연치 않은 모반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동인들이 사화(士禍)를 당하며 지역차별이 야기되었고, 전라도 지역민은 정여립 정신에 대하여 사상적, 사회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1894년 동학혁명이후 다시 전라도 농민군과 인물들이 대대적 탄압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제 식민지화에 맞선 항일의병 운동으로 다시 일어났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정읍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으킨 병오창의(1906)는 전북 항일의병운동의 서막을 열었고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말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북인의 진취적이고 애국적인 정체성은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역사기록에 나타난 완산주는 고려 시대까지 농업과 해양산업이 성대한 지역으로 이를 지키고 확대하려는 자립, 저항 정신이 강한 고을이었다. 이를 이어 받은 전북은 조선 시대 나라의 창고로 여길 만큼 농업국가 재정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 임진왜란 등 국가의 위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지키고 의병과 군량의 보급기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오며 일국의 꺾이지 않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전북의 이러한 정신은 문장과 노래에서도 찾을 수 있고 전승되며 소위 풍류문화로 남아있다.

시론서인 신경준의시칙(詩則), 시조의 원형인 백제의정읍사와 현전하는 최고의 한국 궁중음악인 수제천, 최초의 한문소설금오신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가사 문학의 효시상춘곡그리고 판소리 여섯 마당 집대성 등 창조성 짙은 문화, 예술 활동의 근거지가 된 전북은 고전문학과 한국문화 원형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인재의 보고로 절의로 이름 높은 충신과 의사가 많은 전북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굽힐 줄 모르는 절개와 의리의 문장을 남겼다. 조선 중기 장복겸의구폐소(救弊疎), 임진왜란 시기 조위한의유민탄(流民歎), 을사늑약 때 최익현의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疎)와 같은 명문장이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미술, 영화, 서예인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저항의식과 풍류문화성은 완산주를 중심으로 한 찬란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전북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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