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유명 유튜버라는 마크 맨슨(1984∼)이 한국 방문 후 올린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영상이 회자되고 있다.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진단한 이유들은 이렇다.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단점의 극대화, 능력주의를 내세운 강력한 사회적 압력, 수치심과 남을 판단하는 유교문화, 자율성 부재와 인지왜곡의 나라, 우울증과 외로움이 극심한 나라, 고독사는 많고 ‘고독’은 잃어버린 사회. 어느 하나 부인하기 어렵다. 마지막에 “한국인은 위험한 지평선에서 벗어나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들이 길을 찾을 거라 믿는다.”는 덕담으로 마무리했지만 덕담은 덕담일 뿐이다. 

  사회적 우울증과 치명적 인구 감소로 외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중에도 정치권에서는 김포 서울 편입과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연장 같은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시킬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음주운전 살인 같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성사건들에 대해서는 미온적이면서도 부동산을 들썩거리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런 대응이 공동체의 우울증 심화와 아이들을 낳아 기를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의 원인인데도 바뀌지 않는다.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자본의 질주를 견제하고 사회적 정의를 지키는 가치가 존재하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런 가치가 존재하지 않고 보호되지 않으면 현재의 한국사회처럼 공동체는 파괴된다. 20년 전에 당시 프랑스 문화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었던 파스칼 오리(1948∼)는 한국을 방문했다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여우와 닭이 똑같이 자유롭다면 닭은 곧 잡아먹히게 된다.” 그가 했던 이야기는 문화와 경제(신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지만 가치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가치에도 악화惡貨가 있고 양화良貨가 있다. 오로지 돈이 우선이고, 가해자 중심인 논리는 악화 중에서도 악화다. 악화는 내버려 두어도 스스로 성장하지만 양화는 내버려 두면 고사한다. 수시로 악화를 걸러내어 양화가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한국은 악화를 걸러낼 수 있는 사회적 여과장치(거름망)를 상실한 것 같다. 

  수도권 집중현상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성 범죄들에 관대한 처벌은 대표적인 사회적 악화다. 그걸 걸러내 주는 사회적 여과장치는 교육과 인문학이 아니라 공적 영역(정치와 법률)이 최우선으로 감당할 역할이다. 그런데 한국은 정치와 법률체계가 오히려 악화惡貨로서 빛을 발한다. 

  작고하신 박경리(1926∼2008) 선생께서 이런 말을 남기셨다. “생존하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다.”좋아하는 말이지만 선생의 말씀은 오독될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 생존에 조명을 집중하면 다른 것들이 무대에서 흐릿해지고 만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한국사회는 그 말을 제대로 오독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생존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지만 ‘어떻게 생존하느냐’라는 부대조건이 양화로 존재한다. 양화를 보호하며 유지되는 나라가 진짜 잘 사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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