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규 (시인, 교육학박사)
/송태규 (시인, 교육학박사)

/송태규 (교육학박사, 시인)

언제부터인지 내가 좋아하는 축구 경기 시즌이 끝나면 TV 앞에 앉을 일이 거의 없다. 그나마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찾아보는 게 ‘동물의 왕국’ 정도이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약육강식이라는 생태계의 신비를 소개하는 화면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포식자(먹는 쪽)에게 쫓기는 피식자(먹히는 쪽)를 보면 포식자의 난폭함이 밉고 그저 쫓기며 당하기만 하는 피식자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생태계의 먹이사슬이려니 체념하며 마음을 달랜다. 피식자는 다른 포식자로부터 위치나 정체, 동작 따위를 숨기기 위해 몸의 빛깔을 주위와 비슷하게 만든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진화인 셈이다. 메뚜기나 송충이 따위의 몸 빛깔이 그 경우다. 포식자 또한 예외는 아니다. 자신을 숨기고 은밀하게 피식자의 곁으로 다가가 목숨을 낚아채기 위한 술책이다.

전두환 5공화국이 서슬 퍼렇던 1983년 1월에 입대했다. 훈련을 마치고 내 뜻과는 전혀 다르게 전투경찰이 되어 서울경찰청 기동대에 배치받았다. 당시 기동대는 데모 학생들을 진압하는 게 가장 크고 중요한 업무였다. 눈뜨자마자 시위 진압 훈련하고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에는 교통신호를 조작해가면서까지 신속하게 출동했다. 시위가 없는 날에도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시위에 대비해 늘 진압복을 입고 대기했다.

어떤 날은 언제 어디서 시위가 열릴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미리 현장을 차단하기도 했다. 초임 시절에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입수하는지 신기해하다 차츰 알게 되었다. ‘학원반’이라는 정체를 말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5공 시절에는 대학 캠퍼스는 물론 강의실에도 정보과 형사들이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학원사찰을 했다. 그 무리엔 안기부(현 국정원)나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요원들도 섞여 있었다. 더하여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은 전경들도 학교당 수백 명이 학생으로 위장하여 학생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이들이 사이비 교직원과 학생인 이른바 학원반이다.

남을 속이고자 본래의 태도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거나 꾸밈, 또는 그러한 수단이나 방법. 사전에서 풀이한 ‘위장’의 뜻이다. 군인은 적진으로 침투하기 전에 장비를 위장하고 군복으로 적에게 자신의 정체를 은폐한다.

지난 16일 카이스트 학위 수여식장에서 학위복으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 무리가 한 졸업생의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그날 윤 대통령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십시오.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제가 여러분의 손을 굳게 잡겠습니다"라고 했고, 한 졸업생이 '"R&D 예산 복원하십시오! 생색내지 말고 R&D 예산..."이라고 외치는 순간 비슷한 졸업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졸업생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들어 졸업식장을 빠져나갔다.

불과 얼마 전인 1월 18일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에서 국회의원이 입이 틀어 막힌 채 들려 나갔고 지난 1일에는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이 대통령이 참석한 정부 주재 의료개혁 민생토론회에서 퇴거불응 혐의로 입이 틀어 막힌 채 끌려 나간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현직 국회의원이 대학졸업생이 의사회장이 입이 틀어 막혀 내동댕이쳐지는 시대가 되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국민의 입을 죄다 틀어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끓는 솥도 뚜껑을 막으면 빈틈을 찾아 넘친다. 모르긴 몰라도 ‘동료 시민’ 가슴속 솥도 마찬가지라는데 한 표를 던지며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척하지만, 본질은 완전히 다른 것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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