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이 진행된 23일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는 도민들의 슬픔에 찬 눈물이 대지를 적셨다.

이날 국회의사당에서 동교동 자택과 서울광장, 국립 현충원까지 김 전 대통령의 운구가 진행된 가운데 도민들은 분향소와 자신의 자택 그리고 역 등지에서 그를 마음 속에 묻었다.

▲영결식이 시작된 오후 2시 전주시 고사동 오거리 문화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모여 대형 스크린 속에 보이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애도했다.

분향소에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시민들의 발걸음은 이날 오후 2시 현재 4000여명이 넘어서며 김 전 대통령의 영정에 헌화하며 애도했다.

추모객들은 분향소 옆에 마련된 방명록에 ‘이 땅에 사시면서 많은 아픔과 시련을 미래에 평화와 화합을 꿈꾸시며 모두 감당하신 당신께’, ‘정직과 마음에 선구자이신 당신을 보내드리며’ 등의 글귀를 적어 김 전 대통령의 그리움을 표현했다.

광장 테두리에 내걸린 추모쪽지에도 ‘오로지 대한민국을 사랑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 대한민국 5000만 명이 당신을 기억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있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라는 글들이 빼곡했다.

가족과 함께 조문 온 황선철(51·전주시 중노송동)씨는 “역경세월을 사시다 가셔서 아쉽고 앞으로도 그 분 같은 사람은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며 “이승에 있었던 안 좋은 일은 다 털고 좋은 것으로 가시길 바란다”고 애도했다.

임시분향소 앞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박수빈(13)양은 “분향소가 마련된 오거리 광장을 지나다가 일손이 부족한 것 같아 친구들과 함께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 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타신 대통령이 돌아가신게 매우 안타깝고 하늘에서도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민주당 전북도당사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도 당직자들의 안타까움과 슬품이 이어졌고 전주역과 전주시회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도 승객들의 애도가 계속됐다.

▲앞서 영결식을 하루 앞둔 지난 22일 오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문화제가 전주시 고사동 오거리 문화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문화제에서는 참여자치시민연대 등 40여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열린 가운데 분향소 앞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고인이 된 김 전 대통령을 눈물로 추모했다.

추모문화제가 시작하기 전부터 오거리 광장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이 대형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면서 시민들의 발걸음이 집중됐다.

또 오거리 광장을 에워싼 고인에게 보내는 추모 글들이 빈자리 없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추모제는 사회자 박일두씨의 ‘하늘에 별이 떨어진 것 같다’는 말로 시작됐다.

행사 시작을 알리는 말과 함께 박씨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87일 만에 한국 민주주의 대명사였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비통하고 가슴이 아팠다” 며 “평생을 헌신하고 가신 김 전 대통령의 가시는 길을 추모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주시립국악단 신성우씨는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하셨던 ‘목포의 눈물’을 아쟁으로 연주했고, 도지정무형문화제인 최선씨도 김 전 대통령이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살풀이춤을 췄다.

또 박남준 시인이 지은 추모시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 고인의 안식을 기원했고, 이어 신삼석 목사 등 3명이 조사를 낭독하는 시간도 이어졌다.

이날 오거리 문화광장에는 50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김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함께 위로하고 추모했다.

한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기간 동안 도내에서는 전주 오거리문화광장과 전북도청사, 민주당 전북도당 등 모두 29개의 분향소가 마련됐고 이날 3시 현재까지 6만1000여명이 찾아 김 전 대통령을 애도 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에서 34km 떨어진 외딴섬 하이도(현 하의면 후광리)에서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5년 해방 후 청년실업가로 성장한 이 시기에 정치에 발을 디뎠다.

그는 3번 출마에 모두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4번째 보궐선거에 출마해서야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당시 5·16쿠데타로 당선 4일 만에 자격이 박탈됐다.

1972년 일본에 건너간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망명, 유신 반대 첫 성명서를 발표했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1979년 10·26 사태로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12·12사태로 전두환이 비상계엄 선언으로 체포,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각국 지신인과 정치인 등이 펼친 구명운동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여러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침내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취임한 뒤 부도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IMF관리체제 불구하고 조기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한편, 이른바 ‘햇볕정책’이란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펼쳐 2000년 6월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10월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및 한반도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유진휘기자.trujen@ /김승만기자.na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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