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고등학교
고창고등학교
하오산 당산나무
하오산 당산나무

 

고창 부안면 동남부에 위치한 오산리는 풍수지리상 자라형국이다. 자라형구인 까닭에 오산(鰲山)이라 했다. 마을 유래나 지명도 모두 자라와 관련이 있다. 현재 오산마을의 중핵은 하오산의 금구영감댁이다. 금구영감댁을 중심으로 마을이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전에 부안(富安)은 고부군에 속했다. 조선시대 문헌이나 고지도에 부안은 고부지로 표기돼 있다. 1914년 상오산, 하오산, 우수점, 구정리와 이서면의 동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산리’라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됐다.

오산리의 자연환경은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다. 평탄면과 오룡천을 자라형국으로 해석해 오산이라 하였던 점이 이를 웅변해 준다. 오산리에는 오래된 초등학교, 마스토미가 세운 고창고보 전신인 오산학당과 하오산교회, 천석지기인 금구영감댁이 도도히 흐르는 세월을 감내하고 있다.

이곳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초등학교가 있다. 1919년 4월 일본인 마스토미에 의해 설립된 사립 오산보통학교가 그 모태다. 1922년에 마스토미는 오산보통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시켰고 1923년 6월 부안공립보통학교로 인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학교 안에 무상한 세월을 보여주고 있는 석탑이 하나 있다.

문헌 등에 따르면 오산리 상등들에는 탑들이라는 이름 하나가 더 붙는데 오래 전부터 석탑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당시 오산저수지에서 둑이 터지면서 누군가가 이 석탑을 부안초등학교에 옮겼다고 하고 혹자는 광복 직후에 옮겨졌다고도 한다. 석팁은 그 양식이 통일신라의 석탑에 비해 정교하지 못한 까닭에 고려 후기나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석탑은 기단 부분의 석재 세 개 위에 갑석과 1층 탑신 그리고 1층 옥개석과 시멘트로 보완한 2층 탑신 및 2층 옥개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 옥개석 위에는 상륜부의 보개가 올려져 있다. 석탑의 총 높이는 약 220cm이다.

1층 갑석의 길이는 약 135cm, 1층 탑신의 높이는 약 65cm, 탑신의 한 번의 길이는 약 63cm, 그리고 1층 옥개석의 한 번의 길이는 100cm등이다. 2층 탑신의 높이는 약 44cm이고 높이가 약 25cm이다. 탑의 원래 층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층 석탑으로 추정된다.

하오산의 당산나무는 하오마을 마을회관 앞에 있다. 팽나무로 높이가 약 10m 둘레가 1.5m로 나무의 일부가 괴사된 상태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비는 당산제를 지냈다. 음력 2월 1일 진시에 술과 과일, 포, 밥, 떡 등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는데 제에는 마을의 남자들만이 참여했다. 제가 끝나면 굿을 치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줄다리기, 인근의 농악대까지 참여한 대규모의 합굿 등이 펼쳐졌다. 굿을 치면서 줄을 메고 당산나무에 줄을 감은 이들은 당산나무 앞에 모여 고사를 지냈다.

한말의 살롱으로 알려진 금구영감댁은 금구군수를 지낸 이현승이 태어나 자란 집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댁의 주인장들은 마을에 굶는 자가 있으면 자신들의 큰 수치로 여겼으며 나누고 베풀면서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한말에 문학을 논하고 예술을 향유했던 살롱이기도 했다.

금구영감 이현승은 1873년 부안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운유거사 이경섭의 손자로 참봉이 되었다가 외부참서관, 금구군수 등을 지낸 인물이다. 아현승의 덕행을 기리는 비가 지금도 금구에 남아 있다고 한다. 당시에 흉년이 들자 이현승은 나락 100석을 궁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전언도 있다. 이현승을 금구영감으로 부르는 까닭은 그가 금구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대대로 살았던 큰집과 작은집을 ‘금구영감댁’이라고 부른다.

이현승은 관직에서 물러나 부안면 오산리에 살면서도 덕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을에 굶주린 이가 있다면 그것이 곧 자신의 수치라 여겼던 이현승은 흉년으로 마을사람들이 굶주릴 때마다 자시의 곳간 문을 열어 이들을 도왔다고 한다.

또한 부안초등학교 전신인 부안공립보통학교 교시 증축을 위해서 당시 거금인 7백원을 기부했으며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재산을 학교에 기부했다. 당시 고창고보 이사는 고창의 천석지기들로 구성됐다.

일제강점기에 고창지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사업가이자 교육자인 마스토미는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또는 승부장로라 불렀다. 1880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그는 1904년 러·일전쟁 때 군에 징집돼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07년 마수토미 데르코와 결혼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데르코로부터 감화를 받은 마스토미는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 1911년 12월 마스토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김제와는 떨어진 부안면 오산리에 11보 정보의 땅을 개간하여 그곳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이듬해는 농장에 교회를 서립했으니 그 이름이 하오산 교회다. 더불어 흥덕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이 때가 1912년이다. 당시 마스토미는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뜻을 따라 살 것, 열심히 배울 것, 예수님을 믿을 것 이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고 한다. 마스토미는 기호학당에서 공부하던 윤치병, 양태승, 김영구 등을 일본의 고베신학교에 유학시켰다. 배워야 조선이 독립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마스토미는 1920년 오산학교를 모토로 중등교육기관인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마스토미는 사과농장의 이익금 모두를 오산고보 학생들의 무상교육에, 실력 있는 교사 초빙에 섰다. 당시에 학생들이 마스토미를 두 번째 아버지로 여길 정도였으니 오늘날에도 보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경제상황이 나빠진 마스토미는 1922년 오산고보 운영을 포기하게 이르렀고 고창의 유지들이 오산고보 인수를 결의했으며 동시에 마스토미에게 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고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한 오산고보를 오산리에서 고창 읍내로 이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전국 최고 학교로 이끌었던 마스토미는 55세 짧은 나이에 생애를 마감했다. 마스토미는 일본이 한국에 가한 폭압적 행동을 양심 있는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 진심어린 사과와 회계를 했다고 한다. 마스토미는 삶터와 교육이 일체되는 농학공동체를 꿈꾸었으며 그의 청교도 사랑은 당시의 한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마스토미의 선의와 선행을 뒤늦게 인정한 정부가 1995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그가 복음전도사로 위장한 식민지의 지주에 불과하다는 평판도 존재한다.

올해 110주년이 되는 오산교회는 1912년 10월 일본인 마스토미가 부안면 오산리 196번지에 마련한 예배당이 그 모태다. 그의 사과농장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22명과 함께 예배를 보면서 시작된 교회의 이름이 ‘하오산교회’다.

이 교회는 1982년 부안면 중흥리 504번지에 교회건물을 신축해 이전하면서 ‘오산교회’로 명명했다.

/고창=신동일기자·s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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