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선마을
음선마을
양선마을
양선마을
80년대음선마을공동우물
80년대음선마을공동우물

 

장수군 장수읍 소재지에서 2km 떨어진 곳에 방촌 황희선생의 출생지인 선창리 마을이 있다. 선창리 마을은 음선과 양선마을로 나뉘어 위치해 있으며, 넓은 들이 펼쳐진 마을 앞 저멀리에는 장수의 명산인 팔공산(1151m)이 자리하고 있다.

선창리는 마을의 형국이 배를 선창가에 달아 놓은 것 같다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늙은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형국이어서 선창리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앞서 가고자 한다는 뜻에서 선창(船倉)이 선창(先唱)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엔 장천현의 현청 소재지기도 했다. 1413년(조선 태종 14년)에 장천현을 장수현으로 고쳐 부르면서 현청 소재지를 선창리에서 장수리로 옮겼다.

마을 앞 음양지들을 사이로 양선마을과 음선마을로 나뉘는데 양선마을은 풍수상 좋은 땅이며 음선마을은 검고 기름질뿐 아니라 물이 넉넉해 논농사에 적합한 땅을 가지고 있다.

 

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

농사 짓기 좋은 땅을 가진 마을이자 황희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한 선창리는 장수향교가 창건되고 현재 선인들의 위패를 모신 창계서원이 있는 역사 깊은 마을이다.

- 누석단 세운 후 양선마을과 부의 균형을 이룬 음선마을 이야기

장수읍 장천로를 따라 북쪽으로 1km를 내려가면 우측으로 높이 3m쯤 되는 음선마을 대리석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 이정표를 따라 500m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선창리 음선 마을이다.

 

장수읍 선창리 음선마을

마을 입구 길 양 옆에 두 개의 누석단이 서있는 하마거리 숲이 나온다. 누석단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음선길과 음선 아랫담길과 음선 윗담길 등 3개의 마을 안길로 나뉘며, 마을 앞으로는 팔공산이 자리하고 있다.

음선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도로 양측에 누석단(서낭당-기도터) 한 쌍이 있는데 마을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좌측에 있는 누석단이 할머니 당산, 우측에 있는 당산이 할아버지 누석단이다.

 

장수읍 선창리 음선마을 입구의 누석단(서낭터)

누석단이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양선마을이 양지라서 풍수상 좋아 마을의 부호들이 대부분 양선마을에서 나옴으로써 양선마을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음선마을 입구 누석단을 세웠다고 한다. 누석단을 세운 이후 두 마을의 재산이 비등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 두 개의 누석단이 있는 곳에는 작은 숲이 있는데 문헌에 따르면 그곳에 동헌이 있었으며 황희 정승이 이곳에서 출생했다. 향교가 있었고 창계서원이 있는 곳이라서 사람들은 예를 갖추는 의미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전해진다.

- 음선마을과 최씨 이야기

조선 말엽에 배씨, 최씨, 김씨의 3성이 당초 숲안이라는 터에 살았는데 식수를 얻고자 우물을 파니 배의 밑 바닥에 구멍이 뚫려 배가 마을에 가라앉아 마을이 화를 당한 형국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최씨는 음지쪽인 지금의 음선마을에 터를 잡고, 배씨, 김씨는 양지쪽 양선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 중용의 미를 알았던 방촌 황희 선생의 출생지

선창리 음선마을은 방촌 황희정승의 출생지이다. 황희(1363∼1452)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성품이 어질고 청렴하며 충효가 깊어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있는 정승으로 칭송받고 있다.

황희 선생의 아버지 황군서 공이 1361년 장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장수 현감으로 와 있을 당시 장수현 수내면 선창리 당동, 장수고등학교와 음선마을 사이의 불당골이 옛 동헌이 있던 곳이라고 전해져오는 내아에서 황희 선생이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외직으로 나와 있던 수령들이 임지에서 자녀를 낳아도 출생지는 본 주소로 기록했기 때문에 황희선생의 비문이나 묘비명 등의 기록에는 개성이 출생지로 되어 있다.

장수는 황희정승의 본관이며 출생지이기도 하고 황희가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어서 그 연고가 깊다. 황희는 태종의 신임을 얻다가 양녕대군의 세자폐위에 반대해 장계면 월강리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고도 한다.

- 방촌 황희정승을 비롯한 선인들의 위패를 모신 창계서원

양선마을엔 황희정승의 위패를 모신 창계서원도 있다. 창계서원은 장수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조선 숙종 21년(1695년)에 창건되었다가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에 위치한 창계서원

그 후 1958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원됐으며 지방 유림의 공의로 황희(黃喜)·황수신(黃守身)·유호인(兪好仁)·장응두(張應斗)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위패를 모셨다. 이후 1968년에 강백진(康伯珍)을 추가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계서원은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향사일(享祀日)은 음력 9월 10일이다.

 

1407년(태종 7년)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한 장수향교가 선창리 당곡에 창건되었다. 문묘(대성전)가 앞에 완공됐고 명륜당과 동서양재가 차례로 완공되었는데 무려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터가 좁았으며 큰 비가 오면 건물이 침수되는 일이 빈번해 1685년(숙종 11년)에 유림들의 건의로 지금의 장수읍 교촌으로 이전하여 현재의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 남선마을 분동으로 3개 마을을 아우르는 선창리

2014년 12월 장수읍 초입에 위치한 근로자 임대 연립주택 2동(68세대)이 선창리에서 남선마을로 분동되어 현재는 선창리에 3개(양선,음선,남선) 마을이 되었다.

/장수=엄정규기자·cock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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