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동 산단 아경
/팔복동 산단 아경
 /팔과정(전주시 제공)
 /팔과정(전주시 제공)
팔복동정수장
팔복동정수장
삼양사 전경 및 팔과정
삼양사 전경 및 팔과정

 

'전주 낙후 도심'에서 '녹색마을'로 변모하고 있는 전주 팔복동.

사실 전주 팔복동은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지명이다.

팔복동은 본래 전주부성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외곽에 위치한 작은 농촌 마을로, 행정구역상 전주군 조촌면에 속해 있었다. 

1872년 조선시대 지방도를 살펴보면 팔복동의 유래가 되는 ‘팔(八)’이나 ‘복(福)’과 관련된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팔복동에 자리 잡고 있는 ‘신감’, ‘상리’, ‘추천리’의 마을 명칭은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때의 기록인 '전주부사'에서는 이동면 구주리에 대한 지명이 거론되고 조촌면에는 감천리, 유제리, 덕촌리의 지명이 확인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신복리와 주요 마을 이름들은 지명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의 ‘동산농장’이 설립되며 마을들이 새롭게 재편되면서 생긴 지명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팔복동은 기존 조촌면의 일부와 과거에는 전주천의 잦은 범람으로 인해 거주민들이 살기 용이하지 않은 추천 인근 지역을 합쳐 현재 하나의 동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팔복동의 명확한 명칭은 1957년 조촌면 일부가 전주시와 합쳐지면서 당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신복리와 조촌면 일대의 팔과정에서 ‘팔(八)’자를 따와서 팔복동이라고 했다. 

팔복동에는 ‘팔과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송사심의 제자인 8명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8명의 선비는 홍남립, 이흥발, 이흥록, 필선 이기발, 장령 이후선, 진사 이생발, 선비 이순선, 송상주이다. 

팔복동에 있는 팔과정은 이 8명의 선비가 17세기 과거에 급제한 후 세운 정자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건립된 팔과정은 없으며 현재 추정되는 위치에 현대식으로 세워져 있다.

1957년 이후 팔복동은 일부 영역의 변화는 있었지만 큰 변화 없이 동의 영역을 유지했으며 각각의 주요한 마을을 중심으로 팔복동1가에서 팔복동3가로 나뉘었고 1994년 동산동 내의 고랑동에 포함되어 있는 감수마을 인근 지역이 일부 합쳐지면서 팔복동1가의 일부를 편입해 팔복동4가로 구획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팔복동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그 근거로 ‘호남대로’를 들 수 있다.

우선 호남대로는 조선시대 전주부성의 서문지에서 나와 숲정이를 거쳐 현재의 하가지구, 그리고 팔복동 구주마을과 완주 비비정 일대를 거쳐 삼례역으로 빠져 나가게 된 다. 

한양 도성까지 이동하는 호남대로 관련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팔복동 일대는 전주부성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중심지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조촌면의 유제리나 감천리, 동곡리와 같은 마을을 중심으로 농촌 풍경이 나타나면서 호남대로가 관통하는 길목이 팔복동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팔복동은 일제강점기에도 교통의 요지였다. 팔복동이 교통의 요지였음을 보여주는 키워드는 ‘전군가도’와 ‘철도’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개설한 전군가도가 과거 호남대로와 중첩되며 팔복동을 지나갔는데, 한때 벚꽃100리길로 유명했던 ‘전군간도로’와 동일한 노선이다. 

결국 일제 수탈의 가슴아픈 길인 ‘전군도로’의 초입이 팔복동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철도 교통이 여객운송 뿐만 아니라 화물운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전북철도주식회사가 부설면허를 받아 1914년 10월 철길을 준공했다. 주요 철길은 현재 익산을 지나 삼례 그리고 철교를 건너 현재의 동산동-고랑동-팔복동4가-팔복동1가를 거쳐 기린대로를 따라 이어졌으며 그 당시에는 협궤식으로 개통을 했다. 

1927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이 철도를 매수해 광궤로 개축하고, 경전북부선이라고 개칭했다. 

팔복동에 철도가 들어서면서 철도 주변으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는데, 신복마을이 여기에 해당했다. 1919년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수치지형도를 살펴보면 신복리가 철도 바로 옆에 형성된 것이 확인된다.

팔복동은 인근 지역인 동산동의 ‘동산농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동산농장은 미쓰비시의 창업주인 이와자키 재벌에 의해 운영이 되었는데, 팔복동에 위치한 넓은 들판이 동산농장의 소유로 알려졌다. 

1945년 해방 이후 팔복동은 일제강점기와 같이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가면서, 지역주민들이 논과 밭을 일구면서 살아가게 됐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팔복동은 아직 전주시가 아닌 완주군 조촌면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다. 

1957년에 팔복동이 완주군 조촌면에서 전주시 팔복동으로 동명이 개칭되고, 전주시 한 지역으로서 그 역사를 이어나가게 된다. 전주시 편입 초기에도 팔복동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을 띠고 었다.

농촌지역이었던 팔복동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였다. 

1968년에 전주제지는 현재 팔복동3가 일대에 공장을 설립한다. 이와 더불어 도로망이 정비되고,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택 등이 건설되면서 팔복동에는 공단과 주거군락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후 팔복동1가를 중심으로는 1969년 삼양사에서 폴리에스테르를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전주 제1산업단지가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1985~1987년도에는 전주 제2산업단지가 조성돼 대기업을 비롯, 중소기업들이 입주를 하면서 섬유, 기계, 화학, 식품 등의 공산품을 생산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단이 들어서면서 팔복동의 많은 마을들이 해체되고 그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타지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 공단 배후지를 중심으로 첨단산단 및 탄소밸리 등이 조성돼 지역이 활성화돼 있고 인근 지역인 만성동과 동산동이 동시 도시재생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전주 팔복동에 거주하는 김 모(62)씨는 "팔복동 스마트그린도시 조성사업이 완료되면 팔복동 일원 산단지역에서 발생하는 기후·환경문제 등이 해결되고, 노후화된 주거환경이 친환경 마을로 재탄생할 것"이라며 녹색마을에 대한 부푼 꿈을 기대했다.

  /최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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