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 영정(국립민속박물관)
황신 영정(국립민속박물관)
황신 전라감사 임명교지
황신 전라감사 임명교지
황신 전라감사 교서
황신 전라감사 교서
황신 호패(상아)
황신 호패(상아)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황신은 1597년(선조 30) 8월에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12월 7년 전쟁이 끝날 때 이임하였다. 전라감사로 재임하면서 전란에 불탄 전라감영 선화당을 중건하였으며, 일본군 토벌에 주력하고, 전란이 끝나갈 때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재정에 밝아 광해군 즉위년 대동법 시행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호조판서를 6년간 역임하면서 전란 후 어려운 재정문제 처리에 공헌하였다. 

▶문과 알성시에 장원 급제

황신(黃愼, 1562~1617)은 본관이 창원이며, 자(字)는 사숙(思叔)이고, 호는 추포(秋浦)이다.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처는 왕실 원천군(原川君) 이휘(李徽)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나이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27세 때에 알성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알성시는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해서, 친림하여 단 한번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부정기 시험이다.  

황신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 사건 때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면서 국청 대신들을 논박했다가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되었으며, 1591년에 정철이 선조에게 후계자를 세울 것을 간하다가 파직된 건저의 사건 때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황신의 당색은 서인이다.

황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광해군의 분조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전란으로 인해 조정을 둘로 나누었는데, 광해군이 또 하나의 조정 분조를 이끌고 남하하여 의병을 독려하는 등 전쟁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황신은 이 분조에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전란 중에 명나라 사신과 함께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정유재란과 남원성 전투

1593년 화의가 진행되면서 전란이 이후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에 일본은 14만 대군을 편성하여, 7월에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8월에 전라도 공략을 최우선 목표로 재침을 본격화하였다. 

우키다와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5만 6천여명이 북상하고 남원성에 조명연합군 4천여명이  집결하였다. 명나라 장수 양원이 군사 3천을 인솔하고 남원성에 들어왔으며,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군사 1천명이 남원성에 합류하였다. 

남원성 전투는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4일간 벌어졌다. 치열한 혈전 끝에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전라병사 이복남 등은 시초더미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남원 만인의총은 이때 남원성에서 순절한 군관민 만여명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명나라 장수 양원은 남원성이 무너지기 전에 도망하였다. 양원은 이 일로 후에 명나라에서 처형되어 수급이 조선에 바쳐졌다.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은 미리 도망하여 일본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이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였던 일본군은 9월에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대첩을 거두고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백리에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남원성 전투 때 부안 변산에 피신

남원성 전투 때 전라감사가 황신이다. 조선은 일본의 재침 기세에 황신을 전라도 관찰사로 임용하였다. 1597년 7월 25일에 전라도관찰사에 제수하였으며 임지에는 8월에 부임하였다. 그런데 당시 황신은 전주 감영으로 오지 않고 부안 변산으로 피신해 있었다. 

『난중잡록』, 정유년 8월 13일조에, “이때 본도 감사 박홍로가 이미 바뀌고 황신이 그를 대신하여 감사가 되었으나, 변산으로 달아나 왜병을 피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 그 해 9월 5일 기사에는,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감사는 한 도(道)의 주장으로서 마땅히 힘을 다해 국사를 돌보아야 하는데 풍문만 듣고는 멀리 도피하여 해안에 가 있으면서 도내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처리할 생각이 없으니 속히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감사는 도내 군사의 총책임자이기도 한데 전라감사 황신이 남원성 전투에 간여한 기사는 없다. 남원성이 무너지자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이 모두 도망하였는데 전라감사 황신의 책임을 묻는 기사도 없다. 

남원성 전투나 전주성 수호의 책임이 그에게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듬해 1598년 1월에 부제학 신식이 전라도를 돌아보고 아뢴 내용에, 감사 황신은 수하에 거느린 군사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호남이 창고이므로, 일본이 재침의 기미를 보이자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 조달을 위해 재정에 능통한 황신을 전라감사로 임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전라감영 선화당 중건 및 대마도 정벌 주장

황신은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듬해 1598년(선조 31)에 전라감영 선화당을 건립하였다. 『완산지』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선화당이 소실되었으며, 이듬해에 전라감사 황신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신은 또 전라감사 재임시 특명으로 어머니를 모셔와 봉양하였다.

황신은 일본군이 물러가던 1598년 12월 21일 전라감사로서 대마도를 정벌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왜군들의 뒤를 쳐서 나라의 수치를 씻자고 주장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바른 의논으로 여겼다. 판중추부사 이덕형도 황신의 소를 들어 대마도 정벌을 주창하였다. 황신은 일본군이 물러가던 이 달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이임하였다. 

▶ 재정에 능통, 호조판서로 6년간 재임   

전쟁이 끝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영의정 이원익의 주장으로 대동법이 ‘경기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었다. 황신은 재정에 능통하여 대동법 시행에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해군의 분조에서도 재정을 관할하였으며, 선조 32년에는 호조참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지역 특산물을 토지에 부과하여 미곡으로 내는 조세제의 획기적 개편으로, 1608년(광해 즉위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1623년 (인조 1) 강원도, 17세기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순으로 확대되었으며, 1708년(숙종 34)에 황해도까지 실시되어 평안도 함경도 양계 지방을 제외한 전국에 시행되었다. 대동법은 균역법과 함께 조선후기 조세제의 근본적 개혁이다. 

황신은 1609년, 광해군 원년 9월에 호조판서에 임용되어 광해군 5년 5월 계축옥사에 연루될 때까지 6년간이나 재임하였다. 그는 재정문제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해 광해군 대 전후 어려운 재정문제 처결에 주력하였다. 『광해군일기』, 그의 졸년 기사에, “황신은 6년 동안 (호조판서) 자리에 있으면서 치재(治財)를 잘하였고, 또 균전사(均田使)를 내보내어 토지구획을 잘하는 등 시행한 일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황신에 대한 광해군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계축옥사로 유배, 배소에서 죽음

황신은 1612년(광해 4)에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계축옥사는 1613년 3월 명가 출신 일곱명의 서자들이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이첨은 이 사건을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기 역모로 몰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살해하였으며, 1618년에는 인목대비마저 유폐시켰다.

황신은 호조판서로 있다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황해도 옹진에 유배되었으며 1617년(광해 9)에 배소에서 졸하였다. 그의 시호는 문민(文敏)이며,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선영에 있었는데 1964년에 충남 부여 창강서원 뒤로 이장하였다. 묘갈, 상석,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 등은 원래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창강서원은 황신을 배향한 사액서원이다. 

황신은 딸만 셋이 있고 아들이 없어서 아우 황척의 아들 황일호를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황일호의 아들 황윤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황신의 영정, 전라도관찰사 임명 교지와 교서, 호패 등을 비롯해 부여의 황신 종가 유물 수십여점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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