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동읍 낙평리 전경(출처 봉동100년사)
봉동읍 낙평리 전경(출처 봉동100년사)

 

‘물꼬 열면 논, 물꼬 닫으면 밭‘

이 한줄에 완주 봉동 낙평리의 농업환경이 모두 담겨져 있다.

같은 토지를 땅주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논으로도, 밭으로도 경작할 수 있을만큼 우수한 토양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낙평리를 주축으로한 완주 봉동읍은 ’생강원예농업 1번지‘로 불리운다. 

낙평리는 고산천이 자유곡류하며 퇴적된 충적평야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조선 후기에도 이 곳에는 여러개의 작은 하천이 형성됐으며 일제강점기에 인공제방을 쌓아 마을 규모가 점점 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낙평리는 지리적으로 봉동 동남쪽에 위치해있다. 근대시기부터 봉동생강의 중심지였으며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과채류 원예농업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봉동읍에서 생강 및 과채류 원예농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봉동지역 최대 밭농사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는 봉동에 산업단지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전까지 일부 상업지역을 제외한 봉동읍 전 지역이 전형적인 논농사지역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낙평리의 농업 특징이 잘 나타난다.

특히 낙평리는 주변지대에 비해 높게 형성된 마을이라 모래가 많은 사질토가 발달돼 물 빠짐이 좋고 유기질이 풍부하며 일조량이 많다. 

밭작물인 생강은 토지 배수가 좋아야 한다. 낙평리 지역 밭은 야산이나 구릉을 개간해 조성했기 때문에 경사면을 이뤄 빗물 배수에 매우 용이하다.. 토양도 황토 뿐만 아니라 바위나 돌 부스러기, 즉 모래 성분이 섞이ᅟᅡᆫ 마사토 지대가 많다. 

이러한 토질의 이점을 살려 일찍부터 생강을 대규모로 재배해 봉동을 생강의 대명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낙평리는 전주부 봉상면에 속했지만 18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때 전주군 봉상면에 속해졌다. 이후 1914년 지방행정구역 재개편때 주변 10개 마을의 일부를 통합해 ‘낙평리’라 칭하며 봉동면에 편입됐다. 그러전 중 1935년 완주군이 전주군에서 분리되면서 자연스럽게 완주군 봉동면 낙평리가 됐고 1973년 봉동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낙평리라는 지명은 없으나 ‘구한말지형도’에는 낙평리 지명이 표기돼 있다. 특이한 점은 토지이용 표기가 과수원으로 칭해져 있다. 아마 당시 생강밭을 과수원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낙평리는 소재지권이지만 상권의 발달 대신 생강을 주작물로 하고 1930년 설립된 ‘봉상산업조합’이라는 근대적 농업경영 방식을 도입한 특징을 지닌 원예농업지구이다.

동아일보 1937년 8월20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937년 낙평리를 중심으로한 봉상산업조합원의 규모는 720여 농가에 달한다(봉동100년사 참조) 이 규모라면 봉동생강의 최대 생산지임이 분명하다. 

이 자료를 근거로 추론해보면 낙평리는 일찍부터 밭지대라는 입지적 특성을 반영해 벼농사 대신 생강이라는 특산품을 전략상품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벼농사와 생강재배의 수익성과 재배여건, 기술력, 노동력 투여 정도, 판매 경로 등 산업적 선택을 빨리 내린 결과이다. 

왜냐하면 낙평리는 맨 위에서 언급했듯이 논으로도, 밭으로도 토지이용이 모두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봉상산업조합의 산업적 경영 증거로는 당시 봉상생강의 신문광고도 참고할 수 있다.(봉동100년사 발췌 사진 참조)

 산업마케팅 경영방식을 도입한 봉상산업조합은 일제강점기때부터 언론을 상대로 적극적인 광고마케팅을 펼쳤다. 이후 해방 후에도 광고전략은 계속됐다. 조합 설립    과 광고 마케팅 전략은 ‘봉동생강’이라는 특산품을 국내 대표 브랜드로 구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산업조합이라는 근대적 경영방식과 광고 마케팅 전략이 봉동생강의 국내 점유율과 브랜드 가치를 한층 강화한 것이다. 

봉상산업조합은 또 부속병원도 운영했다. 부속병원 운영은 두 가지 측면의 전략이 있었다. 우선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일컫는 지역사회 환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생산 노동자의 지속적 노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보건의료 혜택 차원이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6일자 기사를 보면 봉상산업조합의 부속병원 운영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봉동100년사 발췌)

“봉상산조에서 병원 직영”(당시 제목)

‘전북 완주군 봉동면에 사단법인으로 조직된 봉상산업조합에서는 1만3000인구가 거주하는 면내에 의료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하야 작년도 예산안에 가입시켜 2000여원에 예산으로 병원을 건축하고 전주 충성의원장 양해룡씨에게 교섭하야 1일 1차씩 출장하야 환자를 치료하도록 결정하고, 그 반면에 동 조합에서는 연 600원을 보조함과 동시에 조합원에 대하여 치료비 오할 이하로 한다는데, 금년도에 예산을 풍부하게 계상하고 의원을 직영으로 하고 일반 조합원에게는 무료치료한다는데, 동 조합원은 전 이사 윤건중 씨에게 대하야 그 열정을 칭송한다고 한다’ (기사 원문)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위 기사에 따르면 봉상산업조합에서 조합원은 물론이고 1만3000여명의 봉동면민 보건의료를 위해 병원을 신축하고 전주에서 두 명의 의사가 격일로 근무를 했으며 조합원에게는 특별히 진료비의 50% 이하를 요금으로 받다가 특별예산을 추가 편성해 ㅜ무상의료를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국민건강보험 못지않게 파격적이다.

봉상산업조합에서 이렇게 근대적 의료체계를 도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조합의 예산 규모와 수익이 컸기 때운일 것이다. 그 근거로는 당시 봉상생강이 국내 시장에서 큰 차지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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