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제공
김용근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제공

우리 조상들은 조선팔도를 금수강산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다.

어느 한곳 사람 살지 못할 곳이 없으니, 조선은 천국의 땅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감록이라고 부르는 책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열 군데를 지목했다.

이른바 십승지지가 그것이다. 그 십승지지 중에, 지리산의 운봉이 있다.

정감록에 표시된 십승지는 상도 풍기의 차암 금계촌, 화산소령의 옛 땅인 청양 현으로 경상도 동쪽마을,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 네 시루목이 연결된 곳, 전라도 남원의 운봉행촌,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 유구마곡의 두 물길 사이,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 상류, 전라도 무주의 무봉산 동쪽 동방산동, 전라도 부안의 금바위 아래, 경상도 합천의 가야산 만수동을 이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들 십승지지의 땅이 예로부터 질병이 없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전쟁이나 범죄가 적거나 없어서, 사람살기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 지리산 운봉이 왜 십승지에 들어 있을까?

지리산 운봉은 가야로부터 삼국,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요충지였고,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냉해가 심해서 농사가 잘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십승지의 요건에 해당되지 않을 것 같은데 십승지였다.

운봉은 1930년대 신작로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흔 아홉 고개를 넘어야 오갈 수 있었던 첩첩산중 지리산 분지 속에 있는 작은 나라와도 같은 고을이었다.

외부 세계와도 소통이 쉽지 않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생활 세계를 가졌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노는 것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교육의 방법까지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을 가졌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자급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소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리산에서 자라는 붉나무에서 소금을 얻어 생활을 했다

소금나무라고 불리는 붉나무는 오배자 나무라고 불렀으며, 가을이 되면 이 열매껍질에 생긴 짠 성분을 소금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사용하게 될 소금이 필요하여 지리산 벽소령을 넘어 화개장터까지 가서 소금을 구해왔다.

운봉사람들은 서리태 콩을 짊어지고, 벽소령을 넘어 화개장터로 가서 소금으로 교환하여 왔다.

지리산의 소금 길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화개장터의 유명했던 서리태콩 두부는, 소금길 문화에서 생겨났다.

삼십 명으로 이루어진 운봉의 소금무데미들은, 노랫가락을 부르며 지리산을 넘나들면서, 소금과 서리 태 콩을 주고받으며 살았다.

그 소금무데미 선창 꾼은 훗날 동편제 판소리꾼이 되기도 했다.

지리산 벽소령에 가면 지금도 소금장수의 무덤이 있다.

누군지 모를 그 소금장수 무덤의 주인은, 오늘도 운봉고을 사람들이 소금지게를 지고 지나가기만을 바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의 운남성을 지나는 차마고도 보다도, 더 사람 냄새나는 한국의 염두고도(鹽豆古道 - 소금과 콩이 오고가던 오래된 길)가 지리산에 있고, 그 출발지 시원의 비밀은 아영의 고분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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